“우리 사회의 조직 원리로 자리잡고 있는 연고에 의한 인간관계를 발전적으로 계승하고 제도화하기 위해 우리 모두의 노력이 절실히 필요하다.”유석춘 연세대 사회학과 교수가 최근에 펴낸 한국의 사회발전이라는 책에서 한 주장이다. 유 교수가 ‘연고주의 예찬론’을 편 건 아니다.
누구나 다 연고주의가 좋지 않다고 말은 하지만 행동은 전혀 달리 한다는 걸 부정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
유 교수는 그런 현실에 주목하여 ‘연고주의 불가피론’을 제기한 후, 그럴 바엔 연고주의를 더 나은 방향으로 이끌 수 있게끔 하자는 ‘연고주의 긍정론’으로까지 나아간다.
나는 유 교수의 주장에 동의하진 않지만 그의 문제 의식엔 뜨거운 지지를 보내고 싶다. 무엇보다도 솔직해서 좋다.
공개적인 말과 글로는 연고주의를 비판해 놓고 자신의 사적 영역에선 누구 못지않게 연고주의를 실천하는 사람들을 너무 많이 봐서 질린 탓에 유교수의 솔직함이 신선하게까지 여겨진다.
그런데 문제는 연고의 원초적 불평등에 있다. 좋은 연고를 만드는 데에 ‘기회 균등’이라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학연이야 별개로 친다 하더라도 혈연과 지연은 타고 나는 게 아닌가.
그걸 제 아무리 발전적으로 계승하고 제도화한다 하더라도 연고의 극심한 불평등은 해소될 수 없다. 오히려 불평등이 극도로 심화할 것이다.
유 교수도 어렴풋한 문제 의식만 갖고 있을 뿐 자신의 주장을 확고한 신념으로까지 굳힌 건 아닌 것 같다.
왜냐하면 유 교수는 그 책에 실린 다른 글에선 지역감정의 극복과 해소 차원에서 “공정한 경쟁을 통하여 기회의 평등이 유지될 수 있도록 절차상의 민주주의를 사회의 모든 분야에서 확립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기 때문이다.
연고의 활용은 ‘공정한 경쟁’과 ‘절차상의 민주주의’에 부합되는 것인가? 아무리 생각해도 아닌 것 같다.
그렇다면 연고주의를 긍정하기로 한다면 공정한 경쟁과 절차상의 민주주의는 일부나마 유보되어야 하는 게 아닌가.
나는 차라리 그런 주장이 나오기를 바란다. 그러면 생산적인 토론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현재 한국 사회에선 거의 대부분 ‘겉 다르고 속 다른' 태도를 취한다. 너의 연고주의는 추하지만 나의 연고주의는 아름답다는 식이라고나 할까.
나는 연고주의 타파가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면, 연고주의 타파를 외치는 것은 그 말에 수긍해 실천으로 옮기는 착하고 순진한 사람만 피해를 보게 만드는 게 아닌가 하는 회의를 갖고 있다.
차라리 각종 연고가 부실한 사회적 약자들이 좀 다른 방식으로 강한 인맥을 만들게 함으로써 사회적 강자들의 친목을 빙자한 연고주의의 이권화에 대응케 하는 것이 훨씬 더 낫지 않을까?
동의는 할 수 없을망정 이 같은 중요한 문제에 대한 논의의 계기를 마련해 준 유 교수의 참신한 발상은 높이 평가되어 마땅할 것이다.
/ 강준만·전북대 신문방송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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