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 없는 가난한 집 장손. 형제 중 유일하게 공부를 잘해 명문대를 다닌다. 그런데 어느날 아버지도 모르는 양공주의 딸과 결혼하겠다고 한다.할머니로서는 하늘이 무너질 소리다. “내가 널 어떻게 키웠는데”라는 말이 절로 나온다.
SBS 주말 드라마 ‘화려한 시절’의 할머니 콩심(김영옥)도 그랬다. “한번만 봐달라”고 애원하는 석진(지성)에게 물까지 끼얹었다.
사랑이 커 실망과 노여움이 클 수 밖에 없는 그의 행동은 공감을 자아내기에 충분했다.
지난주 콩심이 민주를 만나러 갈 때, 시청자들은 당연히 할머니가 또 두 사람을 떼어놓겠구나 짐작했다.
콩심의 손자 사랑이 유난했던 만큼 내심 그의 편을 들리라 생각했다. 하지만 예상은 빗나갔다.
콩심은 민주에게 “석진과 미국으로 떠나라. 대신 나 살아있는 동안 돌아와야 한다”고 한다.
심지어 며느리(박원숙)가 받아들이지 못할 것을 염려해 일체 비밀로 한다. 민주만큼이나 시청자들에게도 놀라운 콩심의 변화였다.
하지만 그다지 반가운 변화는 아니었다. 그 동안 보던 콩심과 너무 달랐기 때문이다.
이제까지 그려진 콩심은 삶의 유일한 희망인 손자를 위해서라면 몇 끼 굶는 것도 마다하지 않는 1970년대의 전형적인 억척 할머니 상이다.
그런 그가 불과 며칠 사이에 이성으로 감정을 완벽하게 억제하는, 2000년대에도 별로 존재하지 않는 진보적인 할머니가 되다니.
못 배웠지만 경우바른 콩심의 성정으로 모든 것을 이해하려 해도 좀체 납득이 가지 않는다. 변화를 설명해 줄 만한 어떤 기제도 없기 때문이다.
작가는 할머니를 극의 중심, 나아가 가족 간의 모든 문제를 주재하는 조정자로 만들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가족 간에 발생하는 모든 대립이 가족 구성원에게 상처를 남기기보다는 집안의 어른이 질서를 잡아주고 좋은 말로 타일러 결국 화합을 다지는 이상적인 가족을 만들고 싶었던 것일 수도 있다.
앞으로 석진이 미국을 가든, 가지 않든 콩심은 며느리와 손자를 다독이고 화해시키는 역할을 하게 될 것이다.
하지만 그것이 작위적으로 느껴지지 않으려면 적어도 처음부터 콩심이 그런 인물이라는 것을 시청자들에게 미리, 보다 충분히 알려주었어야 한다.
회를 거듭할수록 많아지는 가족애에 대한 도덕 교과서 같은 설교에도 불구하고 드라마가 재미를 잃지 않은 것은 등장 인물 각각의 심리와 그 관계에 대한 세밀하고 설득력 있는 묘사 때문이었기에, 갑작스레 일관성을 잃어버린 콩심의 변화가 더욱 아쉽다.
김지영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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