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는 재미의 발견

새로워진 한국일보로그인/회원가입

  • 관심과 취향에 맞게 내맘대로 메인 뉴스 설정
  • 구독한 콘텐츠는 마이페이지에서 한번에 모아보기
  • 속보, 단독은 물론 관심기사와 활동내역까지 알림
자세히보기
[나의 이력서] 이주일(16)안병균씨와 나
알림
알림
  • 알림이 없습니다

[나의 이력서] 이주일(16)안병균씨와 나

입력
2002.04.08 00:00
0 0

퇴계로 서울구락부와 영등포 콜롬비아에 출연하던 1981년 여름의 일이다. 당시 밤업소에서는 “이주일을 쓰면 돈을 번다”는 소리가 파다했다.TV에 출연하는 못 생긴 놈이 나와서 상소리를 마구 지껄여대니 사람들이 좋아할 수밖에 없었다.

어느 날 아침, 돗자리와 과일 바구니를 들고 한 사내가 그의 아내와 함께 찾아왔다. 30대 초반쯤 됐을까. 하여간 나보다 어린 것은 확실했다.

그런데 다짜고짜 내게 넙죽 큰절을 하는 게 아닌가. 그리고는 통사정을 했다.

“제발 저 좀 살려주십시오. 전라도에서 맨 몸으로 상경해 고생 고생하다 웨이터 생활부터 시작했습니다. 제발 저희 업소에 출연해주십시오.”

이 사람이 바로 훗날 재계에 돌풍을 일으키며 나산그룹을 세운 안병균(安秉鈞ㆍ54)씨였다.

당시 그는 서울 북창동에서 ‘초원의 집’이라는 조그만 밤업소를 운영하고 있었다.

손님들이 서울구락부와 콜롬비아에만 몰려 다 망하게 생겼다는 것이 그날 그가 하소연한 요지였다. 나는 일언지하에 거절했다. 두 업소의 사장인 최봉호(崔奉鎬)씨와의 의리 때문이었다.

“저 이주일은 TV 아니면 서울구락부에만 나옵니다.”

그런데도 안씨는 1주일 내내 찾아왔다. 결국 그의 집념에 감복하고 말았다.

“그러면 한 달에 2,000만원씩 1년 출연료 2억 4,000만원을 미리 줄 수 있겠느냐?”고 물었다. 묻는 순간에도 2억 4,000만원은 참으로 엄청난 돈이라고 생각했다.

“그 돈을 미리 주면 내가 최봉호씨에게 양해를 구해보겠다”고도 했다. 그는 지체 없이 대답했다. “물론입니다. 출연만 해주십시오.”

얼마 후 그가 사과궤짝 3개를 갖고 왔다. 그때만 해도 진짜 사과 선물인 줄만 알았다. 만원짜리로 정확히 2억 4,000만원이었다. 그렇게 큰 돈을 본 것은 처음이었다.

지금은 비록 망했지만 그의 집념과 장사수완은 정말 놀랍다. 대한민국에서 처음으로 유흥업소CF를 TV에 내보낸 사람이 바로 안씨이다.

많은 분들이 기억하실 테지만 내가 CF에서 “일단 한번 와 보시라니깐요”나 “뭔가 보여 드리겠다니깐요”라고 선전한 것이 바로 초원의 집이다.

어쨌든 내가 출연한 후 초원의 집은 장사가 잘 됐다. 다른 업소는 보통 밤 10시에 손님이 꽉 차는데 초원의 집은 저녁 7시면 만원이었다.

1만 2,000원이던 기본 안주를 ‘이주일 서비스 안주’라고 이름 붙여 5만원에 내놓아도 사람이 미어터졌다. 초원의 집은 결국 1년 만에 내 출연료를 뽑았다.

안 사장은 이후 승승장구를 거듭했다. 밤업소인 ‘무랑루즈’와 ‘홀리데이 인 서울’을 차례로 세워 재미를 본 그는 부동산에도 눈길을 돌려 손을 대는 것마다 떼돈을 벌었다.

1984년 나산실업을 설립해 ‘꼼빠니아’ ‘조이너스’라는 의상 브랜드로 히트를 쳤고, 1990년에는 나산종합건설을 세워 서울 강남 테헤란로에 오피스텔 ‘샹젤리제’를 지었다.

지금은 법정관리에 들어갔지만 나산실업은 한 때 자산규모가 2,000억원에 달할 정도로 재계에서 주목 받았던 젊은 기업이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나산그룹은 결국 나 때문에 생겨난 것인지도 모르겠다.

안씨가 1989년 무랑 루즈, 1990년 홀리데이 인 서울을 차례로 내게 팔고 내가 국회의원이었을 때 당원들에게 운동복을 대주는 등 음으로 양으로 도와준 것도 이러한 인연 때문이다.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세상을 보는 균형, 한국일보Copyright ⓒ Hankookilbo 신문 구독신청

LIVE ISSUE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

0 / 250
중복 선택 불가 안내

이미 공감 표현을 선택하신
기사입니다. 변경을 원하시면 취소
후 다시 선택해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