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9년 4월8일 평안북도 강계에서 일본 헌병 1개 중대가 무차별 사격으로 시위 군중을 학살했다. 이것이 강계 학살사건이다.한반도의 북쪽 끝이라고 할 만한 강계에 3ㆍ1만세 운동의 물결이 닿은 것은 그 해 4월 평양신학교 학생 주하룡(朱夏龍)이 서울에서 독립선언서를 반입하면서다.
4월8일 장날을 맞아 주하룡은 몇몇 젊은이들과 함께 강계 장터에서 선언문을 읽은 뒤 시위를 시작했고 삽시간에 수백명의 군중이 몰려들어 조선독립만세를 외쳤다.
일본 헌병의 발포로 현장에서 다섯명이 죽고 30여명이 체포돼 모진 고문을 받았다. 체포된 사람들 가운데 탁창국(卓昌國)ㆍ김명하(金明河) 두 사람은 장독(杖毒)으로 한 달만에 사망했다.
강계 학살은 3ㆍ1운동 당시 일제가 한반도 전역에서 저지른 수많은 학살사건 가운데 규모가 작은 것이었지만, 이 운동이 가장 외진 곳까지 퍼져나갔음을 일깨워준다.
강계는 지금 북한의 행정구역상으로는 자강도에 속해 있다. ‘강계 미인’이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예전부터 색향으로 알려진 곳이다.
또 이 고장에서는 유능한 포수들이 많이 나와 ‘강계 포수’라는 말도 전해내려오는데, 병인양요 때는 이 곳의 포수 500여명이 차출돼 프랑스군과 싸우기도 했다.
요즘 북한에서 강계는 ‘강계정신’이라는 말로 잘 알려져 있다.
1998년 1월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자강도에 현지지도를 다녀온 뒤 그 해 2월26일자 로동신문 사설에서 제시된 강계정신이란 자기 영도자만을 굳게 믿고 받드는 수령절대숭배의 정신, 영도자의 구상과 의도를 실현하기 위해 투쟁하는 결사관철의 정신, 자신의 힘을 믿고 자기 단위의 살림살이를 자체로 꾸려나가는 자력갱생 간고분투의 정신이다. 앞의 두 대목에서는 시대착오적인 전체주의와 봉건성의 냄새가 매캐하다.
고종석 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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