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권에서 벌어지고 있는 색깔ㆍ이념 공방의 내용과 수준에 대해 비판론이 일고 있다. 대선을 앞두고 대선주자들의 이념과 정책에 대해 토론과 검증이 필요하다는 데는 이론이 없다. 그러나 민주당 이인제(李仁濟) 고문과 노무현(盧武鉉) 고문 사이의 공방과 한나라당 이회창(李會昌) 전 총재가 현 정권을 좌파정권이라고 규정하면서 촉발된 논란이 냉철한 논리에 근거하기보다는 감정과 정서에 호소하는 소모적 정쟁으로 흐르고 있다는 비판도 적지 않다. 색깔ㆍ이념 공방의 핵심축을 이루는 대선주자 진영의 입장과 전문가들의 견해를 들어본다.≫▼이회창 진영 "현정권 개혁방식 포퓰리즘" 압박
한나라당 이회창 전 총재측은 김대중 정권을 ‘좌파적 정권’으로 규정한 논거의 핵심으로 “자유 민주주의와 시장경제의 원칙을 벗어난 정책”을 들고 있다.
이 총재측은 김 대통령의 역사 인식을 가장 먼저 문제 삼고 있다. 6.25를 ‘역사상 세 번째 통일시도’라고 규정했던 김 대통령의 지난해 8.15 기념사를 예로 들었다. 국민의 공감을 도외시한 퍼주기식 대북지원정책에 대해서도 의심의 눈길을 보내고 있다.
현 정권의 개혁의 방식에 대해서도 포퓰리즘의 성격이 짙다고 문제를 제기한다. 시장경제의 논리를 무시한 빅딜, 밀어붙이기식 의약분업 등이 이 총재측이 드는 주요 사례들이다.
민주당 노무현 고문에 대해서는 이념뿐 아니라 행태에서도 극단주의적 좌파의 성격이 짙게 배어있다고 공격하고 있다.
재벌을 해체하고 기업의 주식을 노동자에 분배하자는 재벌관, “남북회담 과정에서 소모적인 체제 논쟁을 그만 둬야 한다”는 통일관과 주한미군 철수 주장 등이 노 고문의 급진적인 사상적 지향점과 맞닿아 있다고 주장한다. 일부 보수 언론을 말살 대상으로 간주하는 생각 등도 극단주의 성향이라고 몰아붙이고 있다.
구시대적 색깔 논쟁이라는 여권과 이부영(李富榮) 의원 등 한나라당내 개혁 성향의 의원들의 공세에 대해서는 “정당이나 대권후보의 이념적 지향성은 당연히 검증돼야 하고, 이러한 이념 검증을 부정적인 시각으로 봐서는 안 된다”고 반박한다.
좌파적 정권이라는 규정은 이념과 사상의 논쟁이요, 정책 논쟁인 만큼 “대답을 회피하지 말고 정정당당하게 논쟁에 임하라”고 압박하고 있다.
최성욱기자
feelchoi@hk.co.kr
▼이인제 진영 "후보자 답변회피는 잘못" 공세
민주당 이인제 후보측은 4일 “대통령 후보의 이념ㆍ 노선 검증은 반드시 필요하다”며 ‘이념 검증론’과 ‘색깔론’을 구별했다. 이 후보는 “과거 군사정권이 민주 인사에 대해 용공 시비를 하는 것이 색깔론”이라며 “정치 지도자가 어떤 노선과 정책으로 정부를 운영할지에 대해 철저한 검증을 받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 후보는 “우리 선거사에서 거의 없었던 노선 논쟁이어서 그 의미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는 국민이 있는 것은 사실”이라며 “우리도 선진국처럼 노선을 놓고 논쟁을 벌일 필요가 있다”고 강조했다.
이 후보의 한 측근은 “우리는 국가보안법 폐지 여부, 공기업 민영화, 복지 예산 증감, 언론개혁 문제 등 주요 정책에 대해 노무현 후보에게 질문을 던졌다”며 “노 후보가 답변을 회피하는 것이 잘못”이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당내에는 “이 후보가 노풍(盧風)을 꺾기 위해 색깔 공세를 시작한 것 아니냐”는 곱지않은 시각도 적지않아 이 후보측이 곤혹스러워 하고 있다. 이 후보측은 “노 후보가 경선 돌입 전부터 ‘한나라당 후보감’ 운운하며 이 후보의 정체성을 먼저 문제 삼았다”며 이 후보의 이념 공세를 ‘정당 방위’라고 주장했다.
김광덕기자
kdkim@hk.co.kr
▼노무현 진영 "保革구도 자극 국민 오도" 반박
민주당 노무현 고문측은 이념ㆍ노선ㆍ사상 공방에 대해 “실체도, 근거도 없는 얘기로 보혁구도를 자극하고 국민들을 호도해 이기고 보자는 구태의연한 색깔 공세”라고 비판한다. 노 고문측은 색깔 공세가 과거지향적일 뿐만 아니라 증거도 없이 일단 제기, 파문을 일으키려는 치고 빠지기의 전형적 수법이라고 보고 있다.
노 고문측 유종필(柳鍾珌) 특보는 “과거 발언이나 기고를 문제 삼을 때도 전체 문맥이나 당시의 시대상황을 감안해 판단하지 않고 특정 대목을 왜곡, 과장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당내 경쟁자인 이인제 고문측도 과거 발언에서 자유롭지 못하다는 것이 노 고문측 주장이다.
유 특보는 "이 고문도 1989년 국회 통일특위에서 주한미군의 존재의미를 재검토해야 한다거나 우리 민족의 의사와는 관계없이 양쪽에 두 개의 체제가 강요됐다는 발언을 한 적이 있으며 같은 해 국회에서 국가보안법을 시급히 폐지해야 한다는 입장을 갖고 있다고 말하기도 했다"고 주장했다.
노 고문측은 또 당내 이념 논쟁은 한나라당 이회창 전 총재의 이념 공세와 맞물려 결과적으로 당력을 소진시키는 결과를 가져 온다고 불만을 터뜨렸다.
고태성기자
tsgo@hk.co.kr
■전문가진단
▼김용호 "現논쟁은 소모적인 말싸움"
현재 진행되고 있는 이념논쟁은 정치권의 부질없는 말싸움에 불과하다. 체계적인 정치경제 이론이나 정교한 국정운영의 원리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상황에 맞춰 나온 정치인의 발언을 문제 삼아 논쟁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상대방의 비판에 대해 제대로 답을 하지 못하고 피하기만 하거나 "독재 정권의 수법"이라고 반박하고 있다. 더욱이 구체적인 국가정책에 관한 토론 없이 이념논쟁이 진행되고 있어서 공허하게 들린다. 좌파나 우파가 모두 이념으로 무장한 것이 아니라 일시적인 정치 성향에 불과하기 때문에 좌우가 모두 언제든지 입장을 바꾸게 될 것이다.
우리 사회가 공산당을 허용해야 본격적인 이념논쟁이 가능해 질 것이지만 북한의 노동당과 대치하고 있는 분단 상황에서 이것은 불가능하다. 이런 상황에서 우리 정당과 대선 후보는 유권자가 가장 많이 몰려있는 중도를 표방하거나 포플리즘적 인기 발언을 통해 표를 모으려고 할 것이다.
국민참여 경선 등으로 정당의 대중화가 이뤄지면 포플리즘적 인기 발언과 좌파적 정치이념을 구별할 수 있는 유권자들의 지혜도 성숙할 것이다. 그리고 정치인들도 지금과 같은 소모성 이념논쟁 보다 국민의 민생과 관련된 정책 토론에 관심을 갖게 될 것이다.
인하대 정외과 교수
▼손호철 "후보자 딱지붙이기식 위험"
정치권의 이념논쟁은 정책대결의 일종이라는 점에서 일단 긍정적이다. 그러나 각 후보자간의 논쟁이 이념에 따른 정책의 실질적인 내용보다는 감정주의, 극단주의로 흘러 안타깝다.
특히 좌파를 척결하려는 듯한 반공주의나 감정에 치우친 행태, 일부 후보자에게 ‘딱지 붙이기’식으로 몰고 가는 것은 문제가 있다. 이념논쟁이 이렇게 흘러가면 우리의 정치 수준을 발전시키기는커녕 정치발전을 위협하는 위험요소가 될 수도 있다.
그래서 대통령 후보 검증 차원에서 필요한 이념논쟁은 정책에 대한 견해를 중심으로 이뤄져야 한다. 예컨대 국가보안법이나 공기업 민영화 문제와 같이 사회적 이슈에 대한 정책과 노선을 놓고 후보들이 어떤 견해를 갖고 있는지 공개적으로 논쟁을 벌이는 게 중요하고 유용하다.
상대 후보가 과거에 한 말을 잡아 색깔을 덧씌우거나 후보의 정책을 단정해서는 안 된다. 이는 바람직한 정책논쟁으로 가는 것을 위축시킬 뿐이다. 50~60년대 유행했던 매카시즘 열풍과 마찬가지로 퇴행적이다.
물론 이기기 위한 선거를 지향하다 보면 네거티브 선거전략의 유혹에 빠질 가능성이 상존 하고 있어 진정한 국가 지도자를 뽑기 위해서는 정책논쟁이 가능하도록 정부나 언론, 국민이 힘써야 한다
서강대 정외과
▼임혁백 "구체적 정책놓고 검증해야"
현재의 여야 공방은 ‘이념 논쟁’이 아니며 ‘매카시즘 논쟁’에 가깝다. 이념 논쟁이란 정치인이 자신의 이데올로기 성향을 밝히고 유권자의 지지를 호소하는 것으로 민주정치에서 바람직하고 반드시 필요하다. 이념 논쟁은 정치인이 스스로를 다른 후보와 차별화하는 수단이므로 상대가 제기하기 전에 먼저 밝혀야 한다.
그렇지만 최근의 공방은 논쟁을 제기한 측이 상대방을 정치권에서 아예 배제시키려는 의도를 깔고 있다. ‘좌파’라는 용어를 사용한 것이 그렇다. 우리 사회에는 냉전 이데올로기가 남아 있어 좌파로 분류되는 정치인이 발붙일 곳은 없다.
최근의 여론조사를 보면 우리 국민은 대통령 후보로 거론되는 정치인이나 집권층에 좌파로 거론될 만한 인물이 없다고 보고 있다. 의혹을 제기한 당사자도 이 사실을 모르지는 않을 것이다.
그 동안 정부가 진행해 온 기간산업 민영화, 의약분업 등을 보면 오히려 우파 논쟁을 벌여야 할 판이다.
그럼에도 특정 정치인이 좌파 논쟁을 들고 나서고 당사자가 이를 부인하는 현실을 지켜보면서 우리의 정치수준이 이 정도 밖에 되지 않은가 하는 자괴감이 들었다. 진부한 매카시즘적 논쟁을 그만두고 구체적 정책에 대해 검증하는 이념 논쟁이 됐으면 한다.
고려대 정외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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