좌우의 역사적 본고장인 유럽에서도 선거 때마다 좌우 논쟁은 벌어진다.그러나 한국과 다른 점은 논쟁이 내실 있는 진짜라는 데 있다. 논쟁은 복지나 세제 문제를 비롯해 구체적인 정책 노선에 관한 성격규정 다툼이지 상대방의 모든 것을 한 색깔로 덧칠해 타격을 가하는 비난공세가 아니다.
서유럽에서 좌파는 죄가 아니다. 선거전에서 후보들은 얼마든지 스스로를 좌파라고 선언한다. 좌파의 출생지인 만큼 좌파라는 용어 자체가 전쟁을 겪은 우리처럼 부정적 이미지로 얼룩져 있지 않다.
우파가 이 표현을 상대를 비난하기 위해 사용하는 경우는 있지만 일반적으로 복지와 평등을 우선시하는 정치적 성향을 지칭한다.
역사적으로 공산당 등 무력으로 체제변혁을 시도하는 극좌파는 서유럽에서 아예 발을 붙이지 못했다. 1970~80년대 유러커뮤니즘도 현실적응력은 발휘하지 못했다. 시장을 인정하는 사회민주주의의 틀 안에서 우파와 정권을 주거니 받거니 하며 다양한 스펙트럼을 보여 온 것이다.
더구나 근래 들어 서유럽 전반에 우경화 바람이 불면서 어떤 정당의 정강정책을 좌나 우라는 딱지 하나만으로 비난하거나 옹호하는 시대는 이제 끝났다.
작년과 올해 이탈리아 노르웨이 덴마크 포르투갈에서 중도우파 내지 우파연합이 집권했다. 특히 영국 독일 프랑스 등 명목상 좌파가 집권한 경우도 좌파의 색깔이 본질적으로 희석되는 변화가 본격화하고 있다.
영국은 1997년 토니 블레어가 이끄는 노동당이 ‘제3의 길’을 통한 ‘급진 중도’를 표방하면서 집권한 이후 지난해 6월 총선에서도 압승했다. 영국 노동당은 국가와 기업의 경쟁력 제고를 목표로 하는 탈규제 개혁노선을 택해 좌파 이론가들로부터 ‘좌파가 추진하는 신자유주의’라는 비난을 들었다. 요즘 말로 하면 무늬만 좌파라는 얘기다.
독일도 게르하르트 슈뢰더 총리가 이끄는 사민당이 공공지출 축소, 사회보장제도 개혁, 노동시장 유연화 등 ‘제3의 길’과 유사한 ‘새로운 중도’ 노선을 걷고 있다. 좌파 연정을 구성하고 있는 녹색당조차 최근 9월의 총선을 앞두고 무력 불사용 원칙을 포기하는 등 현실주의 노선으로 급선회하고 있다.
5월 대통령선거 결선투표를 앞둔 프랑스의 집권 사회당도 ‘쇄신 좌파’를 표방해 사정은 영국이나 독일 집권 좌파와 크게 다르지 않다.
우경화 바람은 거시적으로 볼 때 1980년대 말 90년대 초 소련과 동독 등 현실사회주의가 몰락한 역사적 변환과 맞물려 있다. 특히 사회주의 패배 이후 세계화에 따른 신자유주의 추세가 부정할 수 없는 힘으로 다가오면서 이제 현실을 자본과 노동의 대립으로 파악하는 잣대 자체가 본질적 효용성을 잃게 됐다.
한국의 좌우‘논쟁’을 유럽적 기준으로 보면 어떻게 될까? 좌와 우를 구분하는 핵심기준 가운데 하나인 복지 문제를 예로 보자. 보건복지부 통계에 따르면 한국의 국내총생산(GDP) 대비 사회보장비 지출비율은 11.09%. 프랑스 29.52, 독일 29.24, 영국 25.59%의 절반에도 못미친다.
이런 수준에서는 좌우논쟁이라는 개념 자체가 성립되지 않는다. 중도로 평가되는 영국 노동당이 일부 한국적 기준으로는 극좌가 되기 때문이다.
이광일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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