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지갑속엔 상품권 몇 장이 고이 모셔져 있다. 현대, 신세계, 롯데…? 어느쪽도 아니다. 발행인은 초등학교 6학년인 둘째딸 김서현, 상품권의 이름은 효도상품권.지난해 어버이날, 부모님께 드리는 선물이라며 제 손으로 만든 상품권 넉 장씩을 건네받았다.
안마, 설거지, 청소 상품권이 각 1장씩, 그외에 ‘원하는 것은 뭐든지 해드립니다’라는 백지 상품권까지 끼어 있다.
앞의 것들은 각각 세 번씩만 사용할 수 있고 유효기간도 2001년 12월31일로 되어있었지만 백지 상품권의 유효기간은 ‘펴엉생’이란다.
빨강, 노랑, 초록 색종이에다 싸인펜으로 그린 ‘서혀니의 효도상품권’은 지난해 말 유효기간을 1년 연장 받아 요즘도 요긴하게 사용중인데 쓸 때마다 이런저런 생각을 하게 된다.
학교에서 단체로 만들었다는 이 종이로 만든 효도증서는 밀레니엄 세대들에게는 그야말로 딱이다.
‘어머니, 출세해서 나중에 호강시켜 드릴께요’식의 막연한 약속보다 당장 필요할 때마다 안마와 설거지, 청소 각3회, 얼마나 분명한가. 마음에 들어할까 두근거리며 선물을 고르는 것보다 몇만원짜리 상품권을 주고 받는 것이 일상이 되어버린 지금, 그걸 보고 자란 그들 세대로서는 지극히 자연스런 발상이기도 하다.
그러고 보니 사랑하는 사람들끼리 평소의 희망사항을 상품권으로 만들어 교환해보는 것도 재미있을 것 같다.
고 3짜리 큰 아이한테서는 물론 ‘좋은 대학 합격 100% 보증’이라고 쓰인 상품권을 받고 싶다.
남편에게는 ‘1년동안 술 끊기, 혹은 금연’ 상품권을 달라고 해볼까. 언제나 자기 방 물건이 없어진다고 불만인 큰 애는 ‘내 방 물건 마음대로 안 치우기’를, 남편은 ‘석달동안 내리 술먹고 와도 잔소리 안하기’를 보증하는 증서를 요구할지도 모르겠다.
늘 먼저 전화하시고 나의 단답형 대답을 아쉬워하시는 친정 어머니는 ‘먼저 전화드려 최소한 10분간 대화하기’라고 적힌 유효기간 1년짜리 상품권을 1순위로 꼽으실거고…
요즘 화제인 대선주자 경선을 보면서도 엉뚱한 생각을 해 본다. 누군지는 모르겠으나 ‘당선후 절대로 국민 실망시키지 않기’상품권을 정부 보증으로 발행할 수 있는 후보가 있다면 우선적으로 뽑고 싶은 심정이다.
‘세상에서 제일 좋은 교육환경 보증하기’ 상품권도 나쁘지 않을 것 같고. 그나저나 올해엔 하느님께서 한국형 토니 블레어나 클린턴을 상품권으로 내려 보내주시지 않으려나.
/ 이덕규ㆍ자유기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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