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띤 논쟁과 보복 위협만 놓고 보면 미국의 철강관세 부과를 둘러싼 대서양 양쪽의 싸움은 그저 새로운 무역분쟁으로 비친다.그러나 유럽연합(EU)의 파스칼 라미 무역담당 집행위원은 철강 분쟁을 이용해 EU를 국제 무역의 새로운 '룰 메이커'로 만들려는 의지를 보이고 있다.이는 역사적 의미를 갖는 역할반전 시도다.50년 전 세계 경제를 주도하던 미국은 국제 무역 문제에서 자국의 이익보다 세계 경제 발전을 우선시했고,이런 미국의 재정 경제적 이념이 국제 무역정책의 방향을 결정했다.오늘날 미국은 여전히 세계 경제를 주도한다.
그러나 이런 패권 국가가 국제적 시각을 상실,이를테면 2004년 대통령 선거에서 철강생산주의 표를 얻는 따위의 편협한 국내적 고려에 집착한다면 어떤 결과를 낳을까.
세계 경제 운영에 대해 다른 이념을 가진 누군가가 그 공백을 메워야 할 것이다.유럽에서 가장 전략적 사고를 가진 정치인에 속하는 라미 집행위원이 바로 이런 역할을 꿈꾸고 있는 것이다.
철강분쟁에서 유럽은 룰을 세심하게 지키고 있다.강경한 보복조치도 WTO(세계무역기구)규정에 완벽하게 부합하도록 배려한다.미국의 행위가 비이성적이고 부당하다는 점을 최대한 부각시키려는 것이다.
물론 유럽도 용의주도한 반격에 나섰다.모터사이클에서 오렌지 주스에 이르는 316개 항목의 보복관세 부과대상은 미국 선거를 고려해 선정됐다.부시 대통령이 2004년 선거에서 철강생산 지역의 표를 노리고 있다면,유럽도 표적 보복으로 손실을 입도록 하겠다는 의지를 과시한 것이다.
그러나 라미 집행위원은 2월 중순 로버트 죌릭 미 무역대표(USTR)에게 보낸 서한에서 타협적 제안을 내놓았다.그는 철강 분쟁의 근본 원인이 세계적 생산과잉과 과열 경쟁에 있다고 지적했다.부시 대통령은 경쟁에 몰린 미국 철강업계를 보호,구조조정에 필요한 시간을 벌려 한다.그런데 철강업체 구조 조정을 위해서는 해고 노동자의 연금 등 막대한 비용이 필요하다.
라미는 이 비용과 철강 공장이 문을 닫는 지역의 경제 활성화를 위한 기금을 공동으로 마련할 것을 제안했다.미국 시장에서 판매되는 모든 철강 제품에 2%의 기금 충당금을 부과,구조 조정을 지원하자는 것이다.그 대가로 미국은 수입관세를 철폐하라는 제안이다.
미구의 철강 관세부과는 WTO규약 위반이라는 것이 전문가들의 거의 일치된 의견이다.WTO는 이미 부시 행정부가 수출 기업에 법인세 감면 혜택을준 것을 규약위반으로 판정,미국의 체모에 손상을 주었다.이런 상황에서 다시 타격을 받는다면 세계무역질서 주도국에게는 당혹스런 일이다.
무엇보다 중요한 사실은 미국이 자유무역전통을 스스로 배신한 것이다.미구은 전통적으로 자유무역체제의 룰 메이커였고,유럽은 주요 위반자였다.그러나 이제 상황이 역전됐다.
미국이 스스로 국제무역 질서의 위반자가 되려는 것을 기회 삼아 유럽이 새로운 룰 메이커로 부상하려는 상황인 것이다.
유럽을 철강 분쟁을 WTO에 제소,철강 문제를 넘어 국제 무역과 경제를 규율하는 지도력을 미국에서 빼앗으려 하고 있다.미국이 WTO규약을 위반한 것이 유럽에게 그 규약 해석권을 주장하는 길을 열어 준 것이다.
유럽은 선량한 국제 시민의 역할에 충실한 면모를 과시함으로써,국제 경제 질서를 주도하려 한다.이는 EU의 15개 회원국 공동의 목표다.
NYT신디케이트-뉴시스
슈테판 리히터 온라인 국제경제잡지 '글로벌리스트'발행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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