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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굴 이야기] (2)무령왕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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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굴 이야기] (2)무령왕릉

입력
2002.04.04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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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 고고학계의 최대 성과로 꼽히는 백제 무령왕릉 발굴은 그야말로 우연에서 비롯됐다.‘송산리 벽화’로 유명한 충남 공주 6호분의 결로(結露ㆍ이슬맺힘) 현상을 해소하기 위해 배수로 공사를 하던 중 인부의 삽날에 능 입구의 전돌이 걸려든 것이다. 때는 1971년 7월 9일이었다.

당시 문화재관리국의 풋내기 학예사였던 필자는 김원룡 국립박물관장이 이끄는 발굴조사단의 일원으로 이틀 뒤 현장에 급파됐다.

능 입구를 가로막은 흙더미를 파내려가는 사이 날이 저물고 난데없는 소나기까지 쏟아져 물길을 돌리는 임시 조치만 한 뒤 발굴단은 일단 철수했다.

이튿날 오전 8시 본격적인 발굴 작업이 시작됐다.

입구가 드러나자 발굴단은 수박과 북어, 막걸리로 조촐한 상을 차려 무덤 주인에 ‘방문’을 고하고 작업의 안전을 기원하는 제를 올린 뒤 전돌을 하나하나 뜯어냈다.

돌 틈으로 봉분을 뚫고 들어온 나무 뿌리들이 장막처럼 드리워진 널길(羨道ㆍ연도) 한 가운데 험상궂은 돌짐승(국보 162호) 한 마리가 떡 버티고 서서 우리를 노려보고 있었다. 등골이 오싹했다.

지신에 감호를 부탁하며 안으로 들어서자 무덤 주인을 알리는 지석(誌石)이 눈에 띄었다.

첫머리에 새겨진 ‘寧東大將軍百濟斯麻王(영동대장군백제사마왕)’란 글귀가 한 눈에 들어왔다.

“무령왕이다!” 무덤이 백제의 제25대 무령왕(武寧王ㆍ재위 501~523년)과 그의 왕비 능임을 확인한 발굴단은 흥분에 휩싸였다.

삼국시대 왕릉 가운데 주인이 밝혀진 것은 그 때가 처음이고 지금까지도 무령왕릉이 유일하다.

더욱 놀라웠던 것은 여러 차례 도굴당한 주변의 무덤들과 달리 왕릉 내부가 자연 훼손된 것외에는 완벽하게 보존돼 있었다는 점이다.

발굴단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목소리를 낮추고 눈빛으로 감격을 나눴다.

탄성이 새어나가면 입구에 진을 친 취재진과 구경꾼들이 몰려들어 아수라장이 될 것을 우려한 때문이다.

무령왕릉은 이렇게 1,450여년의 긴 잠에서 깨어 우리 곁으로 왔다.

왕과 왕비의 금제 관식(冠飾ㆍ국보 154,155호)을 비롯해 108종 3,000여점에 달하는 유물들을 통해 당시의 찬란한 문화와 중국과 일본을 잇는 활발한 국제교류사를 복원, 백제의 역사를 다시 쓰게 된 것이다.

그러나 발굴단은 흥분에 들떠 이 엄청난 유적의 발굴을 단 하루만에 서둘러 끝냄으로써 영원히 씻지 못할 큰 죄를 짓고 말았다.

구경꾼들이 몰려들면서 널길에 놓인 청동 숟가락이 밟혀 부러지자 다급해진 발굴단은 철야 작업을 강행, 큰 유물만 대충 수습하고 나머지는 바닥에 엉킨 풀뿌리째 자루에 쓸어담아 나왔다.

무령왕릉 발굴은 이후로도 숱한 ‘사건’을 몰고 왔다.

공주 시민들이 출토 유물을 서울로 옮겨가지 못하도록 데모를 벌여 공주박물관 신축을 서두르게 된 것, 금제 유물을 청와대에 가져가 보였을 때 박정희 대통령이 “이게 순금이냐”며 왕비 팔찌를 손으로 휘어보는 바람에 관계자들이 가슴을 쓸어내려야 했던 일 등 일일이 열거할 수 없을 정도다.

특히 김 단장은 교통사고 등 불행한 일을 잇따라 겪은 뒤 부적 겸 유서를 연구실 책상머리에 써붙여 두었다고 한다.

졸속 발굴에 일조한 사람으로서 필자도 부끄러워 고개를 들 수 없다. 필자는 요즘도 발굴 현장에 가면 그 때의 일을 떠올리면서 평정심을 찾으려 애쓴다.

/ 조유전 국립문화재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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