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 만난 남자와 술 한잔 뒤 “어색한 거 없애게 우리 뽀뽀나 할래요?”라고 말하는 여자.어색하게 그날 밤에 만리장성을 쌓았지만 “나를 사랑하나요…”라는 뜬끔없는 사랑타령으로 남자를 줄행랑 치게 하는 여자.
직설적이고 낯 뜨겁지만 은근 슬쩍 영화 속의 주인공들에게 자신을 대입시키게 되는 성인용 연애담 ‘생활의 발견’의 춘천 여자 예지원이다.
연기인지 실제인지 구분이 안 되는 리얼하고 새로운 캐릭터 예지원이 이전에 내가 알고 있는 그녀였나를 한참동안 생각하게 했다.
■배우가 어떻게 변하니…
1999년 여름 ‘아나키스트’의 여주인공 가네꼬를 뽑는 공개 오디션장에서 처음으로 예지원을 만났다.
‘배반의 장미’와 ‘홍콩 아가씨’를 신들린 여자처럼 보여준 열정의 점수가 가장 높았고, ‘96 뽕’의 여주인공으로 공개오디션을 통과했던 전력이 있는 것으로 보아 그녀에겐 너무 조용하고 색깔을 잘 모르겠다는 모두의 우려를 덮는 본능적인 매력이 숨겨져 있을 것이라 믿었다.
있어도 없는 듯 무색무취한 느낌이었지만 아무튼 100대1의 경쟁을 뚫고 당당히 가네꼬 역을 쥐었다.
늘 긴장에 사로잡혀 부자연스러웠고 개성이 없어 보였고 언제나 같은 억양으로 “잘 부탁합니다” “감사합니다…”만을 반복적으로 말하는 그녀는 웃고 있어도 우울해 보이며 흔히 여배우에게 있을 법한 당찬 욕심도 없어 보였다.
당시 영화가 큰 성공을 거두지 못한 탓도 있었지만, 어렵게 따낸 화려한 여주인공의 자리를 완벽하게 차지하지 못한 채 기억 속에서 쉽게 사라져 갔다.
드라마 ‘꼭지’와 미니시리즈 ‘줄리엣의 남자’ 여주인공이 된 그녀를 TV속에서 만나기도 했지만 여전히 그녀의 연기는 아슬아슬 불안불안하기만 했다.
맹추처럼 착하고 느리기만 한 기억 속의 예지원이 거기에도 있었다.
그러던 어느날, 건들건들 거리며 주먹을 꺾고 목소리를 낮추고 딱 불량 여고생이 되어 나타났다.
나이트에 중독되어 밤무대를 휘어잡는 여고생으로 의외의 즐거움을 주면서 ‘여고시절’ 시청률에 지대한 공헌을 하고 있는 그녀는 내가 알고 있던 수줍고 쑥스러우며 누가 묻기 전에는 아무것도 말하지 않던 조용한 예지원은 더 이상 아니었다.
처음부터 그녀를 돌봐주며 배우의 길로 자리를 잡게 해온 하용수씨와 통화를 했다.
“예지원에게 그런 구석이 있는 줄 나도 몰랐어.” “지금도 그녀에게 들어 온 시나리오를 읽고 있어. (흥분을 섞어) 허허허.” 그의 기분 좋음이 전화로 느껴졌다.
통통한 얼굴의 젖살을 빼려고 강냉이만 먹으며 견딘 독기와 열정이 영화와 드라마 그리고 연극을 오가며 뒤늦게 발휘되고 있는 셈이다.
어느 인터뷰에서 “영화 ‘아나키스트’의 여주인공이었다는 크레딧을 영원히 잊지 못한다”고 한 말을 보았다.
늦게 터진 말문이지만 조리 있게 자기표현을 할 줄 아는 침착한 여자, 예지원의 모습은 예쁘고 당당하다.
어쩌면 예지원은 처음부터 총명하고 똑똑했던 여우(女優)가 아니었을까 하는 배반감마저 용서 될 만큼.
/영화칼럼니스트 정승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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