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의 긴급수입제한조치(세이프가드)로 촉발된 철강 전쟁이 세계 각국으로 확전 양상을 보이고 있다. 이해 당사국들이 잇따라 자국시장 보호를 위한 수입규제 조치로 문단속에 나서고, 수입제품에 대한 반덤핑 조사도 강화하는 추세다. 유럽연합(EU)과 러시아 등은 보복 조치까지 언급하고 있어 이번 분쟁이 철강에 그치지 않고 전면적인 무역전쟁으로 비화할 조짐마저 엿보인다.▽수입규제 도미노
EU는 지난달 27일 예고했던 대로 잠정적인 세이프가드 조치를 취해 미국에 맞불을 놓았다. 정식 세이프가드를 취하기에 앞서 향후 6개월 동안 과거 3년간 평균 수입물량의 110%를 초과하는 물량에 대해 고율의 관세를 부과한다는 조치이다.
중국은 이에 앞서 23일 우리나라와 대만 우크라이나 카자흐스탄 러시아 등 5개국에서 수입되는 냉연강판에 대해 반덤핑 조사를 개시했다. 중국 업계가 제시한 이들 국가의 덤핑 마진율은 16.07~32.05%에 이르며, 특히 우리나라에는 최고 마진율을 적용, 상당한 타격이 예상된다.
이밖에 캐나다가 수입 철강제품에 의한 자국 업체 피해 조사에 착수했고, 말레이시아는 이미 외국산 철강제품에 대해 관세율을 일률적으로 50%씩 인상했다. 자국의 양허관세 범위내에서 인상한 것이라고는 하지만, 방어적 조치라고 하기에는 상당히 급격한 조치이다.
▽세계적인 공급과잉
이러한 철강전쟁의 근본 원인은 공급 과잉이다. 국제철강협회(IISI)에 따르면 전세계 철강 생산량은 조강(粗鋼) 기준으로 8억4,700만톤(2000년)인데 비해 철강 소비량은 7억6,800만톤으로 7,900만톤 정도 공급이 많다. 국내 철강업계에 따르면 실제 공급과잉 물량은 이보다 훨씬 많은 2억~2억5,000만톤으로 추산되고 있다.
결국 이 같은 공급과잉을 해소하지 않으면 철강 전쟁은 계속될 수 밖에 없다. 이에 따라 주요 철강 생산국들은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등 다자간 협상을 통해 공급 감축을 꾸준히 논의해 왔다.
지난 2월 열린 OECD 고위급 철강회의 3차 회의에서는 각국이 철강산업의 지속적인 구조조정을 통해 2005년까지 1억350만~1억1,750만톤 규모의 과잉설비를 감축하자는데 합의했다. 정부의 보조금을 받아 운영하는 등 경제성이 없는 비효율적 설비를 각국이 자발적으로 폐쇄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나라별ㆍ업체별 이해가 엇갈리기 때문에 설비 감축에도 상당한 진통이 예상된다. 더구나 다자간 협상이 무르익고 있는 가운데 미국이 세이프가드 조치를 취함에 따라 협상에 악영향이 예상된다. 이 달 18,19일 열리는 OECD 고위급 철강회의 4차 회의에서 분쟁해결의 실마리를 찾을 수 있을 지 주목된다.
▽정부·업계 대응
정부는 당장은 국내업계의 타격이 크지 않을 것으로 예상하면서도 불똥이 어디로 튈지 몰라 바짝 긴장하고 있다.
우선 EU의 잠정 조치는 기존 수입물량에다 10%를 추가한 물량을 쿼터로 인정하고 있기 때문에 수출에 미치는 영향은 거의 없을 것이란 전망. 다만 선착순으로 쿼터를 제한한다는 점에서 지리적으로 먼 우리나라가 불리한 입장이나, 제품 경쟁력을 갖추고 있어 걱정할 정도는 아니라는 분석이다.
하지만 중국은 사정이 다르다. 중국이 반덤핑 조사를 개시한 냉연강판은 지난해 우리나라가 중국에 수출한 철강재 18억4,000만 달러의 18.6%를 차지하는 3억4,000만 달러(물량으로는 26.5%인 105만톤)에 달해 덤핑 판정을 받을 경우 수출에 큰 차질이 예상된다.
특히 중국 업계가 주장하는 우리나라의 덤핑 마진율이 32.05%로 조사대상국 중 최고 수준이어서 피해가 적지 않을 전망이다.
미국의 세이프가드도 우리 수출에 상당한 영향을 줄 전망이다. 철강협회는 대미 수출 감소가 연간 물량기준 20%, 금액으로는 2억~2억5,000만 달러에 이를 것으로 예상했다. 그러나 경기회복에 따라 철강가격이 회복되고 있어 피해는 예상보다 줄어들 수 있다.
철강협회 김성우 통상협력팀장은 “철강 가격이 연초 대비 10% 정도 올랐고, 연말까지는 추가로 20% 정도 오를 전망”이라며 “그럴 경우 대미 수출 피해는 10% 이하로 낮아질 수 있다”고 말했다.
김 팀장은 WTO 제소 결과에 대해서도 “미국이 질 확률이 90%”라고 낙관했다. 문제는 판정이 내려지기까지 최소한 15개월 이상 걸린다는 점. 다만 승소할 경우 2004년 미국의 대선을 앞두고 세이프가드의 연장을 막는 효과가 있을 것이라고 업계는 예상하고 있다.
한편 이번 철강 전쟁이 전면적인 무역전쟁으로 확대될 가능성은 낮다는 게 일반적인 분석이다. 외교통상부 관계자는 “EU가 보복조치를 취하면 곧바로 미국이 다시 상응하는 조치를 취하게 될 것이고, 결국은 시장이 큰 쪽이 이길 수 밖에 없다”며 “보복은 경고성 발언에 그칠 것”이라고 내다봤다.
김상철기자
sckim@hk.co.kr
■"M&A가 살길이다"
미국 철강업계 현실은 올해 아카데미영화제 남아주연상의 영화 ‘존 큐’의 주인공이 정규직에서 파트타임으로 ?i겨난 철강 노동자라는데서 찾아진다. 아시아 환란 이후 저가 수입철강이 봇물을 이루면서 28개사가 파산신청을 했다.
세계 철강시장은 지금도 2억7,000만톤의 공급과잉에 시달리고 있다. 이에 따라 세계 철강기업들은 국제 교역무대에서 제휴 또는 인수ㆍ합병(M&A)을 통해 힘을 키우고 있다.
미국 수입규제 이후 세계 7,8위 철강사인 독일의 티센그룹과 일본의 NKK가 강판사업에 제휴를 맺었다. 앞서 티센그룹은 1997년 독일과 영국 철강사 3개사를 합쳤고, 리바, 코러스 등도 합병기업으로 재탄생했다.
2월에는 프랑스 유지노, 스페인 아세랄리아, 룩셈부르크 아르베드가 조강생산 연 4,400만톤의 아세롤(Arcelor)로 합병해 증시에 상장됐다.
90년대 중반 유럽에서 시작된 통합 바람은 철강산업이 장치산업이라 규모가 커질수록 이점이 많기 때문이다.
게다가 철강 수요 중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는 자동차 업계는 6개사가 세계시장의 80%를, 철광석은 3사가 70%를 독식하고 있다. 따라서 10개사가 시장의 30% 안팎을 확보한 철강업계도 안정된 시장을 확보하기 위한 통합이 불가피한 현실이 되고 있다.
현재 통합을 발표한 중국 내 2개 그룹과 일본의 JFE 외에도 미국은 US스틸을, 일본은 신일철을 중심으로 업계 재편을 추진중이다.
이 같은 합병이 예정대로 추진되면 포스코는 2005년에 바오샨, 아세롤, NKK가와사키에 밀려 조강생산 1위에서 4위로 추락한다. 동양증권 김수희 연구원은 “이 같은 추세에서 빗겨나 있는 포스코의 독자행보는 향후 성장성을 제한할 가능성이 있다”고 우려했다.
이태규기자
tglee@hk.co.kr
■국내업계 파장
3월초 미국의 철강 수입규제에 대한 국내업계의 반응은 ‘큰 영향이 없다’는 것이었다. 특단책을 마련하는 급박한 분위기도 감지되지 않았다. 1개월 뒤 사태가 세계 각국의 도미노식 수입규제로 번지면서 분위기는 바뀌고 있다.
이번 사태가 수출차질 외에 철강가격 하락 등 제2의 파장을 몰고올 가능성이 점차 높아지고 있기 때문이다. 더구나 통상마찰의 소용돌이는 격화하는데, 뾰족한 대책이 없다는 점도 우려를 키우고 있다.
그동안 업계는 철강 무역전쟁을 예상하고 올해 사업계획에 반영시켜 왔다. 포스코 통상관계자도 “현재까지는 예상대로 움직이고 있다”고 전했다.
미국 수입규제로 올해 약 40만톤의 수출차질이 불가피한 강관 특수강 냉연강판 업체들의 경우 수출지역 다변화, 생산라인 교체 등을 이미 마련한 상태다. 냉연강판을 생산하는 동부제강은 올해 21만톤을, 연합철강은 10만톤을 줄여 각각 석도강판과 칼라강판 등 고가제품으로 교체했다.
환란의 출발점이던 한보철강이 5년만에 양해각서(MOU)를 맺는 등 마무리 수순의 업계 구조조정도 경쟁력을 높일 호재로 분석된다. 또 건설수주 증가로 철근업계는 연 생산 950만톤 대부분을 국내 소진 가능하고, INI스틸, 동국제강 등은 수출물량도 미미한 상황이다.
그러나 미국의 대체시장인 유럽과 동남아 중국 등이 수입장벽을 높임에 따라 수출지역 다변화 전략에 차질이 우려된다. 특히 특수강 강관업계는 물량조절의 융통성이 적어 대책이 거의 없는 상태다. 여기에 철강가격 상승세에 따른 생산증가는 재차 철강가격을 하락시킬 가능성을 키우고 있다.
업계의 한 관계자는 “엔화가 추가 약세로 돌아서면 포스코를 제외한 업체들은 일본, 중국, 동남아에서 경쟁력 유지가 힘들다”고 우려했다. 철강협회는 미국을 제외한 국가의 수입규제는 현재 조사단계라서 금년 말 구체적 결과가 나오는 만큼 문제는 올해보다 내년이라고 지적했다.
김성호 통상협력팀장은 “지금은 업체 대응에 앞서 민ㆍ관 공동의 통상외교에 주력할 때”라며 “적정 수입쿼터를 확보해 안정된 시장을 얻는게 급선무”라고 말했다.
이태규기자
tglee@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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