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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정년 이후] 이규학 前서울대공원 동물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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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정년 이후] 이규학 前서울대공원 동물원장

입력
2002.04.02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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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규학(李圭學ㆍ66)씨는 35년 동안 서울시청에서 근무하다 1998년 6월 서울대공원 동물원장을 끝으로 정년 퇴임했다. 한동안 정년으로 인한 고독감과 소외감에 심한 가슴앓이를 하던 그는 등산을 통해 새로운 인생에 대한 활력을 되찾게 됐다.부인 변정자(邊正子ㆍ61)씨와 함께 지금까지 등정한 산만 700여 개. 1,000개 봉우리를 오르면 수필집도 낼 생각이다. 얼마 전 수필이 당선돼 한국문인협회 회원으로 활동하고 있으며, 삼육의명대학에서 동물학 강의도 하고 있다.≫

퇴직 직후 시간의 굴레에서 벗어났다는 해방감은 곧 씁쓸한 기분으로 변했다. 처음 며칠간은 달콤한 늦잠을 즐기며, 앞날을 설계해 보기도 했지만, 곧 시계 바늘처럼 움직이던 조직생활이 그리워지기 시작했고, 고락을 같이 했던 동료들의 모습이 계속 머리 속에 맴돌았다. 나에게 펼쳐진 새로운 인생에 적응해 나가는 일은 쉽지 않았다.

게으름으로 인해 체중은 늘어갔고, 외로움은 고독감으로 변하면서 하루가 다르게 늙어간다는 생각에 우울했다. 집을 나서면 막상 갈 곳이 없었다.

현직에 있을 때 먼저 퇴임한 선배들이 새로운 직장에 다니는 것이 초라해 보여 나는 조용히 보내겠다고 생각했던 게 잘못이었다. 집에 혼자 있을 때 전화벨이 울려 받아보면 뚝 끊어졌다. 아내 친구들의 전화일 것이다.

노인복지회관을 찾아가 보았다. 노년을 즐겁게 보내기 위해 취미생활에 열중하는 노인이나 벤치에 멍하니 앉아 있는 노인들의 모습을 보면서, ‘나도 저렇게 늙었구나’ 하는 생각에 오히려 발길을 돌리게 됐다.

아직도 활기차게 사업체를 운영하며 활동하는 친구가 부러웠고, 쉽게 사회에 적응하는 친구들을 보면 열등감에 빠졌다. 노년기의 급속한 환경 변화는 큰 충격이 돼 우울증이 생기는 일이 많다는 이야기를 듣곤 왠지 내 이야기인 것 같아 병원을 찾기도 했다.

외길로 살아온 내가 제일 둔하고 나약한 것 같다는 생각까지 들었다. 만나는 사람들이 인사치레로 “요즘 무얼 하느냐?”고 물으면 “왜 그렇게 갑자기 늙었느냐?”는 말로 들려 사람 만나는 것조차 반갑지 않았다.

열등의식이 뭉게구름 피어나듯 온 몸을 휘감을 때면 생명의 의욕까지도 사라지는 것 같았다. 내가 너무나 사회를 단순하게 보면서 살아왔다는 생각에 밤잠을 설친 적도 적지 않았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곰곰이 내 자신을 다시 돌아보게 됐다. 그리고 내 자신은 내가 다스리자고 굳게 다지게 됐다. 고독감이 밀려 올 때 나는 산을 올랐다. 언제라도 찾아가면 반겨주는 산은 내 마음의 안정을 찾는데 큰 도움이 됐다.

사실 산에 오르기 시작한 건 40대 중반부터였다. 공무원으로 일하면서 가장 경제적으로 건강을 유지할 수 있는 것이 바로 등산이었기 때문이다. 아내와 휴일이면 시내버스를 타고 근교의 산을 찾았는데,당시 복잡한 업무 처리로 고심할 때 산 정상에 올라 대자연의 섭리를 바라보면 저절로 해결 방안이 떠오르기도 했다.

86년 아시안게임이나 88년 올림픽 때 공무원들이 휴일도 없이 근무한 적이 있었다. 그때 우리 부부는 휴일대신 야간 산행으로 북한산에 오르기도 했고, 봄이나 여름에는 새벽에 뛰어서라도 산에 올랐다가 출근한 적도 있었다.

정년 후 사회에 대한 열등감에서 벗어나지 못해 고민할 때면, 과거의 화려했던 산행 경험을 되살리며, 용기를 다졌다. 젊음을 되돌릴 수야 없지만, 산을 찾아 심신의 건강을 보충하며 40~50대 경험했던 흐뭇했던 산행 기억을 떠올리는 것은 새로운 인생살이의 윤활유가 됐다. 퇴직 후 4년 동안 오른 산만 무려 700여 개. 산행 횟수만 1,000회가 넘었다.

요즘 나는 일흔을 넘기면 ‘나의 인생과 산행’ 이라는 체험기를 남기려고 산행 후 일기를 적고 있다. 산행 일기를 잘 쓰고 싶어 틈틈이 수필 강좌도 듣고 있다. 얼마 전에는 산행기 덕분에 한맥 문학 신인상을 받고, 한국문인협회 회원까지 됐다. 이런 일들은 정년으로 인한 고독감이나 소외감에서 점점 벗어나는 활력소가 됐다.

나에게 새롭게 펼쳐진 제2의 인생에는 정년이 없었으면 싶다. ‘인명은 재천’이라는 말처럼 언제 어떻게 될지 모르지만 사는 동안은 건강해야겠다는 생각을 갖고 있다. 내 나름대로 세운 계획은 다음과 같다.

일요일은 친인척 길흉사를 참석하고, 행사가 없을 때에는 근교의 산에 오른다. 월요일은 친구들과 만나 고민을 서로 나누고, 조언해 준다. 화요일은 수필학 강좌를 듣거나 컴퓨터 공부를 한다. 수요일은 시내로 나가서 서점에도 들러 보고 친구 사무실도 방문하면서 인생 공부를 한다.

목요일은 내가 공부하고 경험한 실력으로 대학에서 동물학 강의도 하고 도서관에서 공부를 한다. 금요일은 우리 부부가 함께 전국의 산 가운데 우리가 가보지 못한 산들을 찾아 다닌다. 토요일은 부부가 함께 외출하거나 아들 딸들이 손자 손녀들을 데리고 놀러 오면 함께 놀아 준다.

정년 이전보다 더 바쁘게 하루 일정을 따라가다 보면, 정말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살고 있다. 잠자리에서 내일은 무엇을 할까 계획을 세우며, 저절로 흐뭇한 웃음을 짓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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