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8년 아르헨티나대회를 기점으로 월드컵에도 컬러방송 시대가 활짝 꽃피게 됐다. TV로 총 130개국에 중계됐고 결승전은 90개국 10억명이 시청했다(추정).78년 월드컵은 한편으로는 최악의 대회였다. 2년전 쿠데타로 집권한 아르헨티나군부가 인권탄압의 은폐와 정권 연명의 수단으로 이용했기 때문이다.
이미 74년부터 아르헨티나의 정세불안을 이유로 개최지 변경이 공론화했고 군사정권 등장이후에는 보이코트 운동이 펼쳐지기도 했다.
그러나 군부는 외환보유고의 20%에 해당하는 4억5,000만 달러를 투입해 대회를 준비했다. 또 메노티 감독은 성적 부진에도 3년 반이나 장기집권하며 지원을 받았다. 종전 대표팀소집에 부정적이었던 프로팀들도 협조적이었다.
아르헨티나의 우승길은 순조로웠다. 1차리그 이탈리아와의 3차전서 0-1(준결승까지 아르헨티나의 유일한 실점)로 패했지만 무난히 2라운드에 진출, 폴란드에 2-0으로 승리하고 브라질과는 0-0으로 비겼다. 반면 페루를 3-0으로 완파한 브라질은 2차리그 마지막 경기서 폴란드를 3-1로 이겼다.
이제 아르헨티나가 결승에 진출하기 위해서는 페루에 4골차 이상으로 승리해야 했다. 브라질의 결승진출은 확정된 듯 했다.
전반을 2-0으로 앞선 아르헨티나는 뜻밖에도 후반에 4골을 추가, 결승진출팀이 됐다. 페루선수들이 주심의 편파판정에 전의를 상실했다고 하지만 몇 가지 의혹이 제기됐다.
페루의 골키퍼 키토가 아르헨티나에서 귀화한 선수라는 사실, 그리고 아르헨티나가 페루에 3만5,000톤의 곡물을 무상지원하고 5,000만 달러의 차관을 제공키로 했다는 보도가 뒤따랐다.
지코, 리벨리노 등의 스타를 거느린 브라질은 3~4위전서 이탈리아를 2-1로 물리쳐 16개팀 중 유일하게 무패를 기록했지만 우승트로피는 갖지 못했다.
아르헨티나는 네덜란드와의 결승서 대회 득점왕(6골) 캠페스의 선제골과 결승골로 3-1로 승리, 처음으로 국민적인 일체감을 맛보았다. 그러나 흥분은 오래 가지 않았다.
군사정권은 국민의 불만 처리에 다시 급급하게 되었고 그것은 결국 82년 포클랜드 전쟁으로 이어져 실권하는 계기가 되고 만 것이다.
유승근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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