흐트러진 마음을 가다듬기 위해선 어떤 계기가 필요하다. 머리를 짧게 깎아 본다든지 방안의 가구배치를 달리 해 보는 것도 한 방법이다.세계적 스포츠 축제인 2002 한일월드컵축구대회야 말로 뒤숭숭한 우리사회 분위기를 진정(반전?)시키는 소중한 기회가 될 수 있다.
16강에 들지 못하면 민족적 자존심이 손상을 입기라도 할 것 같은데 실은 그렇지 않다. 경기에서 이긴다면 당연히 그보다 더 좋을 수 없겠지만 설혹 졌다고 해서 낭패감이나 좌절감을 가질 이유는 전혀 없다.
다만 이런 축제를 통해 다시 한번 나와 이웃, 민족과 세계에 대해 생각해 본다면 매우 의미 있는 일이 될 것이다.
이번 월드컵은 21세기를 맞아 우리 민족이 세계시민들과 함께 즐기는 축제, 혹은 오락의 장 뿐 아니라 오랫동안 잊고 살았던 인류공영의 가치를 되새기는 거대한 학습의 장이 되었으면 한다.
차제에 나는 E.T.운동을 제안한다. 모두 외계인이 되자는 게 아니라 국민 누구나 E (Excuse me, 죄송합니다)와 T (Thank you, 감사합니다)를 생활화, 체질화하자는 것이다.
나의 경험담 하나를 소개한다. 길을 가다가 갑자기 소나기가 내려 비를 피할 곳을 찾아 종종걸음으로 걷는데 한길에서 차의 경적음이 크게 울렸다.
놀라서 돌아보니 어떤 중년신사가 창을 빠꿈히 열고 “OO증권이 어디냐”고 물었다. “죄송하지만 잘 모르겠는데요”라고 답한 후 곰곰 생각해 보니 죄송한 건 내가 아니고 오히려 그였다. 더구나 그는 고맙다는 말 한 마디 없이 창문을 올리고 달아나듯 가버리는 게 아닌가.
일본을 여행한 적이 있는데 시내나 고궁 어딜 가더라도 “스미마셍(죄송합니다)”과 “아리가또 고자이마시다(감사합니다)” 그 두 마디가 넘실거렸던 기억이 난다. 미안할 일도 아닌데 죄송해 했고 고마울 일도 아닌데 감사해 했다.
듣는 사람이 무안할 지경이었다. 우리는 그 간단한 두 마디를 지나치게 아끼는 경향이 있다. 이번 월드컵 경기 때 세계 각지에서 많은 손님들이 올 테니 이 기회에 죄송함과 고마움의 카드를 수시로 꺼내 쓰는 연습을 하는 게 좋겠다.
운동은 감동과 친구 사이다. 다만 운동은 겉으로 드러나 보이는 데 반해 감동은 보이지 않는 내밀한 가슴속에서 꿈틀댄다.
경기 전에 열심히 연습하고 경기장에선 페어플레이 정신을 바탕으로 개인의 명예보다 팀의 승리를 위해 헌신하는 선수의 모습이 진짜 감동적이지 않은가.
월드컵이 끝나면 곧 선거의 계절인데 선수들의 경기하는 모습을 통해 정치가들이나 유권자들 모두 느끼는 게 많아지기를 기대한다.
주철환 (이화여대 언론홍보영상학부 교수ㆍ 전 MBC P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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