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마테오 리치/히라카와 스케히로 지음ㆍ노영희 옮김/동아시아 발행/3만6,000원1583년 서양 선교사로는 처음으로 중국 땅을 밟은 이탈리아 출신 예수회 신부 마테오 리치(1552~1610, 중국명 리마두ㆍ利瑪竇).
당시는 ‘대항해 시대’를 맞은 유럽이 한 손에 종교, 한 손에 무기를 들고 세계 정복에 나선 시기였다.
그 역시 가톨릭 전파의 첨병으로 명 나라에 파견됐지만 비유럽인들을 미개한 원시인으로만 보았던 여느 선교사들과는 달랐다.
그는 중국에서 유럽과는 다른 또 하나의 찬란한 문명을 발견하고, 그 문화를 속속들이 이해했다.
예수회에 보낸 편지에서 “(종교 문제만 제외한다면) 중국의 위대함은 아무리 보아도 세상에서 가장 뛰어나다”고 적을 정도였다.
중국어를 완벽히 익힌 첫 서양인으로, ‘천주실의’를 비롯해 숱한 한문 저서를 남겼고, ‘사서’(四書)를 라틴어로 번역하는 등 중국 문화를 유럽에 알리는데도 힘썼다.
비교문화학의 권위자 히라카와 스케히로(平川祐弘ㆍ71) 일본 도쿄대 교수가 쓴 ‘마테오 리치’는 그런 리치를 단순한 선교사가 아닌, ‘동서양 문화를 한 몸에 갖춘 최초의 세계인(uomo universale)’으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저자는 리치가 여러 언어로 남긴 저서와 선교 보고서, 편지 등 각종 기록을 분석해 그의 삶과 그가 동서양 문화 교류사에 끼친 영향을 두루 살폈다.
인문학자이자 탁월한 과학 지식을 지녔던 리치는 선교 활동 틈틈이 ‘여지산해전도’ 등 세계 지도와 달력, ‘천지의’ 등 천문기구를 제작, 보급했다.
천주(天主), 아세아(亞細亞), 구라파(歐羅巴) 등 그가 만들어낸 서양 언어의 한자 표기는 지금도 그대로 사용되고 있다.
리치는 특히 유교를 종교가 아닌 도덕으로 파악, 유교적 관습을 용인하고 선교에 적극 활용했으며 아예 유생의 옷으로 갈아입고 생활했다.
이 같은 파격적인 행동은 ‘전례 논쟁’으로 비화해 예수회를 궁지로 몰기도 했지만, 당시 명과 조선에서 핍박받던 서민층은 물론 지식인들 사이에서도 가톨릭이 급속도로 전파될 수 있었던 동인이 됐다.
그는 이름난 선승 삼회(三淮) 스님과 인간의 본질 해석을 놓고 논쟁을 벌인 일도 있다.
궁지에 몰린 삼회 스님이 불경의 권위를 들어 답하자 그는 “나도 나의 신의 권위를 끄집어낼 수 있지만 그렇게 하지 않겠다.
권위가 아닌, 이성을 바탕으로 한 논의를 하고 싶다”고 응수, 말문을 막았다고 한다.
그 후 리치의 학식과 인품에 대한 입소문이 널리 퍼지면서 그가 그토록 소원했던 수도 베이징 영주 허가를 받는 계기가 됐다.
그는 입버릇처럼 말한 대로 “완전한 중국인”이 되어 세상을 떠났다. 1610년 5월 11일 그가 병으로 숨졌을 때 중국인들은 “성인, 진정한 성인”이라고 외치며 목놓아 울었다고 한다.
도쿄대가 자랑하는 세계적 석학인 저자는 1969년 첫 권을 낸 뒤 30년 가까운 추가 자료 수집과 연구를 거쳐 97년에야 2,3권을 완간했다.
평생을 비교문화사 연구에 바친 저자는 이 책에서 400년 역사를 넘나들며 동서양 역사와 문화에 관한 해박한 지식을 풀어놓는다.
다만 한글 번역본은 924쪽의 방대한 분량을 한 권으로 묶어 들고 읽기 불편한 것이 흠이다.
이희정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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