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성란 소설집 '푸른 수염의 첫번째 아내'“아이가 사라진다면 내 삶도 그대로 사라져 버릴 것 같아요.”
하성란(35)씨가 그렇게 말한 적이 있다. 사고로 아이를 잃은 사람의 얘기가 나왔을 때였다.
초등학교 2학년인 딸을 둔 하씨는 단편소설 ‘별 모양의 얼룩’에서 아이가 죽은 뒤 엄마가 겪는 절박한 심정을 헤아려 묘사했다.
어린이들의 생명을 앗아간 씨랜드 화재참사를 배경으로 삼은 작품이었다.
하성란씨의 세번째 소설집 ‘푸른 수염의 첫번째 아내’(창작과비평사 발행)는 작가의 글쓰기가 어떤 방향으로 옮겨 가는지를 분명하게 드러낸다.
제33회 한국일보문학상 수상작인 ‘기쁘다 구주 오셨네’ 등 책에 실린 단편 11편은 ‘대중적’이다. ‘문학적’의 반대말이 아니다.
장면 전환이 빠르고 문장이 편안하게 읽힌다. 등장인물의 심리가 깔끔하게 전달된다.
이런 변화는 작가가 얼마나 기본기를 단단하게 닦았는지를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다.
잘 알려진 대로 그는 꼼꼼하고 정밀한 묘사에 강한 작가였다. 묘사는 대상을 작가 자신의 것으로 만들기 위한 가장 확실한 방편이다.
글쓰기의 대상을 완전하게 장악하는데 오랜 기간 훈련해온 작가는 이제 다음 단계로 넘어간다. 그는 하나 하나의 대상이 모인 전체를 본다.
짜임새 있는 구성과 탄탄한 서사 구조를 갖추는 데 힘을 기울인다. 그 속에 작가의 무기인 세밀한 묘사가 자연스럽게 녹아 든다.
새로운 실험을 위해 작가는 먼저 사회문제에 주목한다.
시골 파출소 순경의 총기 난사 사건을 다룬 ‘파리’, 사냥터의 총기 인명 사고를 그린 ‘밤의 밀렵’은 신문의 사회면에서 찾아낸 소재다.
하씨는 건조한 몇 줄의 기사 너머에서 가슴을 찢는 듯한 오열과 독하고 섬뜩한 살의를 본다. 이렇게 자신이 발견한 감정은 소설 속 인물에게로 매끄럽게 투영된다.
다른 한편으로 작가가 관심을 기울이는 것은 일상의 뒷면에 놓인 가식이다.
‘기쁘다 구주 오셨네’에서 여자는 약혼자의 남자친구들과 함께 술을 마시고 잠을 자다가 얼결에 정사를 나눈다.
아이를 가졌지만 아이 아버지가 누구인지 알 수 없다. 이 어이없는 상황을 덮는 것은 “네 아버지는 파우스트”라고 자위하는 한 마디다.
‘저 푸른 초원 위에’에서 부부는 소아마비 자식의 존재를 애써 마음에 두지 않기 위해 개를 키우기 시작한다.
일상적인 것을 가장하는 이런 장치는 ‘푸른 수염의 첫번째 사내’에서의 오동나무 장롱, ‘오, 아버지’에서의 하늘에 계신 전능하신 하나님의 모습으로 나타난다.
평론가 황현산씨의 말대로 “보통 사람들의 삶과 희망이 얼마나 허약하고 위험한 토대에 얹혀 있는지를 재빠르게 알아채는 작가의 직관 때문에 하씨의 소설은 환상적으로 보이기까지 한다."
김지영기자
kimjy@hk.co.kr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