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27년 3월29일 사회운동가 이상재가 77세로 작고했다. 이상재의 호는 월남(月南)이다. 충남 서천 출신. 월남은 청년기 삶을 뒷날 주미 공사를 지내게 될 박정양의 그늘에서 보냈다.그는 서울에서 10여년 동안 박정양의 식객 노릇을 했고, 1881년 박정양이 신사유람단의 일원으로 일본에 갈 때 그를 수행하며 홍영식 김옥균 등과 사귀었으며, 1887년 박정양이 초대 주미 공사로 임명되자 그를 따라 미국으로 건너가 일등서기관으로 근무했다.
귀국 뒤 월남은 외국 선교사들과 외교관들이 주도하는 사교클럽 정동구락부(貞洞俱樂部)에 가입해 사회 활동을 시작했고, 서재필 등과 함께 독립협회를 조직해 그 단체의 부회장으로서 만민공동회를 개최했다. 독립협회 사건과 개혁당 사건 등으로 옥살이를 하며 구한국의 몰락을 지켜본 그는 한일합방 뒤 교육운동에 주력했다.
조선교육협회 회장, 소년연합척후대(보이스카우트) 초대 총재, 조선일보사 사장 등이 그가 맡은 주요 직책이었다. 월남은 1927년 좌우합작 민족운동 단체인 신간회의 초대 회장으로 추대됐으나 곧 병사했다.
월남의 일제시대 활동 가운데서 생략할 수 없는 것이 1920년대의 민립대학 설립운동이다. 일제의 경성제국대학 설립 움직임에 대응해 월남을 비롯한 일단의 민족주의자들이 벌인 이 운동은 일제의 탄압 못지 않게 그 주동자들의 관념적 현실 인식 때문에 결국 좌초됐다.
이들은 “조선 민족 1천만이 한 사람 1원씩”이라는 구호를 내걸고 민립대학 설립기금 1천만원을 갹출하려 했으나 1백만원도 채 모을 수 없었다.
그럴 만도 했다. 일제의 식민지 수탈 속에서 문맹퇴치 교육조차 제대로 받기 어려운 처지에 있던 조선 민중에게 민립대학 설립운동이란 구름 위의 신선놀음에 불과한 것이었기 때문이다.
고종석 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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