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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굴이야기] (1)백제금동대향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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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굴이야기] (1)백제금동대향로

입력
2002.03.28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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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천년동안 조상들은 이 땅에서 어떻게 살아왔나,그 내력을 일러주는 문화재가 세상에 모습을 드러내기까지 현장에는 발굴전문가들의 남모르는 땀방울이 있었다.이들에게서 주요문화재 발굴에 얽힌 이야기를 들어본다≫1993년 12월 12일. 백제문화의 정수를 보여주는 백제금동대향로(金銅大香爐ㆍ국보287호)가 그 신비한 자태를 드러냈다. 그 날을 떠올리면 지금도 온 몸을 휘감는 전율이 느껴진다.

당시 국립부여박물관장이던 필자는 부여 능산리 고분군 부근 논에서 발굴 작업을 하고 있었다.

이 곳은 83년 한 농부가 논을 갈다 연화문 와당을 발견, 신고해 학계의 주목을 받게 됐는데, 95년 백제 창왕의 이름이 새겨진 사리감(국보288호)이 발견되면서 신라와의 전투에서 숨진 성왕을 기리기 위해 아들인 위덕왕이 567년 세운 절 터임이 밝혀졌다.

이 곳에는 인근 고분군을 찾는 관광객들을 위해 주차장과 부대시설을 지을 예정이었는데 발굴이 시작된 이듬해에 출토된 향로 덕에 지금까지도 계속 발굴 작업이 이어질 수 있었다.

서(西)회랑 북쪽 공방터 습지를 파내려가다 향로를 떠받치고 있는 용의 다리 한 쪽을 발견한 것은 저녁 어스름이 깔리기 시작할 무렵이었다.

대단한 ‘물건’임을 직감한 나는 어둠과 살을 에는 추위에도 불구하고 야간 작업을 강행했다.

땅 속에서 계속 샘물이 솟아 작업은 몹시 더뎠다. 하지만 이 샘물이 자연적인 항온ㆍ항습시설 역할을 해 향로가 진흙 구덩이에 묻혀 오랜 세월을 지내면서도 원래의 모습을 그대로 간직할 수 있었던 셈이다.

유물이 다칠세라 트롤(삽)도 쓰지 못하고 꽁꽁 언 손을 겨드랑이에 넣어 녹여가며 손가락으로 일일이 진흙을 파냈다.

드디어 향로를 수습한 순간, 향로의 몸체에 새겨진 화려한 연꽃에서 떨어져 나온 씨앗 하나가 땅속에 묻혀있다 1,300여년 만에 활짝 꽃을 피워 우리 앞에 나타난 듯한 황홀감을 느꼈다.

나는 캄캄한 하늘을 바라보며 속으로 “고맙습니다! 이제 백제도 자신있게 할 말이 있습니다!”라고 외쳤다.

평생을 백제 연구에 바쳤던 고(고) 연제(연제) 홍사준(홍사준) 선생이 발굴 지역 뒷산의 묘에서 미소를 띠며 우리를 내려다보고 계신 듯 했다.

이런 향로가 국내에서 발견된 것은 처음이어서 중국 것이 아닌가 하는 추측도 있었지만, 이튿날 현장에 급히 달려온 여러 전문가들은 백제의 유물임을 확인해주었다.

비단보자기에 싸고 칠기함에 넣어 수조에 보관한 것으로 보아 백제가 망한 660년 나당연합군이 파죽지세로 몰려들자 한 스님이 절의 최고 보물인 향로를 훗날을 기약하며 감춰둔 것이리라.

향로가 세상에 공개된 것은 12월 20일. 뚜껑 위에 금세 날아갈 듯한 봉황이 조각돼있고 승천하는 용 한마리가 떠받치고 있는 몸체에 사람, 동물 등 수십 가지 물상이 새겨진 향로 발굴 소식을 언론들을 ‘무령왕릉 발굴 이후 최대의 고고학적 성과’라며 대서특필했다.

그러나 아쉽게도 향로에 대한 총체적인 연구는 아직 이뤄지지 못하고 있다.

내년이면 향로를 발굴한 지 10주년을 맞는다. 국내 학자는 물론, 향로에 지대한 관심을 보이는 중국과 일본 학자들도 참여시켜 본격적인 연구를 시작해야 할 때다.

/ 신광섭 국립중앙박물관 유물관리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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