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린 자유세대, 얽메이고 눈치볼게 없다"≪은행 세대교체의 주역. 최근 수많은 선배들을 제치고 40대 나이로 행장에 전격발탁된 홍석주(洪錫柱ㆍ49) 조흥은행장 내정자와 작년 5월 국내 최초의 40대 은행장이 된 하영구(河永求ㆍ49) 한미은행장이 25일 저녁 서울 프라자호텔 일식당에서 만났다.
행장으로 내정되던 날 홍 내정자는 먼저 대학 동기인 하 행장에게 전화를 걸어 “행장 선배로서 한 수 가르쳐달라” 했고 하 행장은 “공식 취임 전이라 (축하)화분 보내기도 어색한데, 저녁이나 한번 하자”고 한 게 이날 약속으로 이어졌다. ≫
행장 내정 후 부담과 긴장감 때문에 몸무게가 2킬로그램 빠졌다는 홍 내정자는 이날 약간 상기된 표정이었고, 행장 취임 10개월을 맞은 하 행장은 여유 있고 자신만만한 얼굴이었다.
두 사람은 반주를 곁들이며 2시간반동안 허심탄회한 대화를 나눴다. 그러나 평소 언론에 나서기를 싫어하는 하 행장은 이날도 “홍 내정자가 뜨는 해”라며 자신은 말을 아끼는 편이었다.
홍 내정자:행장 내정 후 가장 먼저 든 생각은 내가 공인(公人)이 됐다는 것이다. 공인으로서의 책임감, 조흥은행의 전환점을 마련해야 한다는 생각에 밤잠도 안 온다. 나는 지금까지 실무자였고, 하 행장은 경영자였으니 앞으로 많이 가르쳐달라.
하 행장:조흥이 훨씬 큰 은행인데 무슨 말이냐. 은행 내부사정도 많이 다른데 어떻게 섣불리 조언을 하겠나.
홍 내정자:나에게 행장을 맡긴 것은 젊고 역동적이며 국제적인 수준의 은행을 만들어달라는 소명을 준 것이라 생각한다. 시장점유율이나 규모 확대보다 실질적인 시너지 효과를 낼 수 있는 사업확대를 통해 전략적 성장을 추구할 생각이다.
29일로 예정된 조흥은행 임원인사가 홍 내정자의 성향을 알 수 있는 ‘리트머스 시험지’인 점을 감안, 기자가 “40대 행장에 대해 기대도 많지만 우려도 많은데..”라며 말을 건넸다.
홍 내정자:인사권자는 칼자루를 쥔 것이 아니라 칼 끝을 쥔 것이다. (10명 중) 1명을 만족 시키면 9명이 불만을 갖게 되는 것, 그것이 인사의 어려움이다. 이번 인사에서 ‘홍석주의 메시지’가 뭔지 보여줘야 하는데.. 고민된다. 젊고 유능한 인재의 발탁도 중요하지만 고참직원의 경험과 노하우도 소중하게 생각한다.
하 행장:우리는 기득권이 없는, 자유로운 세대다. 윗세대와는 다르게, 하나의 전환점이 되는 세대다. 젊은 나이에 이 자리까지 왔으니 더 이상 얽매이고 눈치볼 게 없다. 오히려 소신껏 일할 수 있는 것 같다.
홍 내정자:이번에 한미가 먼저 해외 주식예탁증서(GDR)를 발행하는데, 한미가 좋은 투자자 다 끌어가는 것 아니냐.(웃음)(한미는 4월 하순쯤, 조흥은 그 이후 GDR발행을 계획 중이다.)
하 행장:우리는 물량이 얼마 안돼서(2억 달러 안팎) 그럴 염려는 없다. 외국에서 한국계 은행에 대한 평가가 좋기 때문에 GDR 발행은 잘 될 것으로 본다. 사실 아시아에서 이렇게 은행 구조조정이 잘 된 나라도 없다.
홍 내정자:동감한다. 나는 우리나라 은행을 바닷가 모래사장에 비유하고 싶다. 손으로 모래를 움켜쥐어도 바닷물이 들어오면 모래가 빠져나간다. 은행 역시 꽉 움켜쥐어도 놓치기 쉬운 부분이 많다. 그만큼 어려운 것이 은행 경영이고, 구조조정이다.
하 행장:홍콩에 기업설명회(IR) 갔을 때 한 투자자가 한국의 국가신용등급이 낮다고 지적하더라. 그래서 환란 이전에 비해 투명성, 지배구조, 경영실적 등 모든 면에서 지금이 훨씬 나은데 신용등급은 오히려 환란전보다 낮다고 했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화제를 은행합병 논의로 슬쩍 돌려봤다. “덩치 큰 국민은행이 두렵지 않나”하는 질문도 던져봤다.
하 행장:합병이 일어난다면 복수로 일어날 가능성이 크다고 본다. 그만큼 합병도 하나의 바람이고, 한 곳이 하면 생존 차원에서 다른 은행도 서두르게 된다. 그러나 (국민은행 이후) 첫 합병이 탄생하기까지는 오래 걸릴 것이다.
홍 내정자:향후 1년간 합병은행 탄생은 쉽지 않을 것이다. 통합 국민은행은 합병 직후 금리움직임을 선도했지만 요즘은 파괴력이 그리 크지 않다. 합병이 그렇게 시급한 사안은 아니다.
자연스럽게 김정태(金正泰) 국민은행장이 화제에 올랐다. 홍 내정자는 행장 내정 후 김 행장부터 찾아가 인사했고 대화 도중에도 그를 여러 번 언급했다.
홍 내정자:최근 발간된 책, ‘큰 장사꾼 김정태’를 읽어봤더니 참 대단한, 끊임없이 생각하고 고민하는 경영자라는 생각을 했다. 배울 점이 많다.
하 행장:항간에는 김 행장의 스톡옵션에 대해 질투의 시선도 있지만, 그것은 옳지 않다. 구 주택은행장 시절 향후 주가가 불확실한 상황에서 봉급을 포기하고 스톡옵션을 선택한 것 아니냐.
홍 내정자:맞다. ‘기회의 균등’은 좋지만 ‘결과의 균등’을 요구하는 심리는 곤란하다. 공산주의의 몰락, 일본의 경제위기, 이 모든 게 ‘남이 잘되면 나도 잘 돼야 한다’는 평등주의의 패착에서 온 것이다.
하 행장:요즘 가계대출 부실화 문제가 이슈로 떠올랐는데 선진국에 비하면 우리나라의 소매금융은 시작단계에 불과하다.
홍 내정자:그렇다. 가계대출은 앞으로 2~3년 더 늘어나도 괜찮다. 소매금융 분야에서 앞으로 개척할 영역이 무궁무진하다.
자리를 정리하고 일어설 무렵 기자가 위성복(魏聖復) 행장과의 관계에 대해 묻자 홍 내정자는 “각계에 발이 넓은 위 행장이 내게 부족한 인적 네트워크를 채워줄 수 있지 않겠느냐”고 말했다.
홍 내정자는 또 “위 행장은 경륜이 많고 사리판단이 분명한 분이다. 절대로 후임 행장을 어렵게 할 분이 아니다”고 했다.
이날 저녁은 먼저 제안한 하 행장이 냈다. 홍 내정자는 2시간 반도 짧은 듯, “못다한 얘기는 내일 이메일로 주고 받아야겠다”고 말했다.
하 행장은 “우리 홍 내정자가 오랫동안 행장을 잘 할 수 있도록 언론에서 많이 도와달라”는 당부도 잊지 않았다.
남대희기자
dhnam@hk.co.kr
▼홍석주(조흥은행장 내정자)
1953 광주 출생
1971 경복고 졸업
1976 서울대 경여학과 졸업
1976 조흥은행 입행
1985 미 펜실베니아대 와튼스쿨 MBA
1986 런던지점 과장
1993 종합기획부 과장
1997 종합기획부 차장
1998 리스크관리실장
2000 기획부장
2001 2월 상무
2002 3월 행장
▼하영구
1953 전남 광양 출생
1972 경기고 졸업
1976 서울대 무역학과 졸업
1981 미 노스웨서턴대 MBA
1986 한국 자금담당 이사
1987 한국 투자금융그룹 대표
1995 한국 기업금융그룹 부대표
1997 아시아·라틴아메리카 지역본부임원
1998 한국소비자금융그룹 대표
2001 한미은행장
■닮은점·다른점
은행권 ‘40대 기수론’의 중심이 된 홍석주 조흥은행장 내정자와 하영구 한미은행장. 하 행장이 외국계 은행 출신이라면 홍 내정자는 ‘원조 조흥맨’으로 토종세력이지만, 그들은 닮은 점이 참 많다.
우선 49세 뱀띠로 서울대 상대 동기. 공교롭게도 혈액형도 같은 B형이다.
홍 내정자는 깐깐하고 철두철미한 ‘기획통’으로 소문나 있고, 하 행장은 무섭도록 소신이 뚜렷하고 고집이 세기로 유명하다.
하 행장은 취임 후 외부 인사를 임직원으로 영입하면서 노조의 반발을 사기도 했으나 “앞으로 성과를 두고 보라”며 정공법으로 돌파한 적이 있다.
또 다른 공통점은 둘 다 동안(童顔)이라는 점. 홍 내정자는 “후배와 저녁을 먹으며 반말을 했다가 종업원에게 (나이도 어린사람이 반말 하냐고) 야단맞은 적이 있다”며 웃었다. 하 행장 역시 옆 머리를 짧게 깎아올린 모습이 나이보다 훨씬 젊어보인다.
“일요일에 홍 내정자를 만나려면 아침에 청계산에 갔다가 양재동 하나로마트에 가면 된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홍 내정자는 주말에 부인 김인자씨와 등산을 즐기고 함께 쇼핑한다.
운동신경이 없어 골프도 구력은 오래됐지만 잘 못한다(핸디 90대 중반)는 게 홍 내정자의 말. 반면 하 행장은 등산, 골프(88타), 스키는 물론 스노보드까지 못하는 운동이 없는 스포츠 애호가이다.
주량은 막상막하이고, 노래실력도 둘 다 수준급. 하 행장의 애창곡은 ‘러브 미 텐더(Love me tender)’ 등 팝송이고, 홍 내정자는 광주방송국 어린이 합창단 출신이지만 정작 본인은 “요즘엔 음정을 못 맞춘다고 종종 구박 받는다”고 한다.
둘은 대학시절에는 학과가 달라 서로 몰랐지만 사회에 나와 알게 된 사이. 지난해 9ㆍ11 미국 테러사태 때 뉴욕에 기업설명회(IR)를 하러 갔다가 같은 호텔에 묵으며 더 친해졌다는 후문이다.
부장에서 행장이 되기까지 1년1개월밖에 걸리지 않은 홍 내정자와 자금ㆍ기업금융ㆍ소매금융 등 전분야에서 실력을 다진 ‘팔방미인’ 하 행장. 앞으로 두 사람의 경영스타일은 어떻게 대비될지 궁금하다.
남대희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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