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시아가 최대 산유국의 자리를 탈환했다. 러시아는 지난달 하루에 원유 728만 배럴을 생산해 719만 배럴의 사우디 아라비아를 제쳤다.구 소련 붕괴 후 10여년 만이다. 석유 수출에서도 1월에 3위에서 2위로 올라서 1위인 사우디 아라비아를 바짝 추격하고 있다.
경제전문가들은 석유수출국기구(OPEC)를 주도하고 있는 사우디 아라비아가 국제 석유 시장의 왕좌를 곧 러시아에 내줄 것이라고 전망하고 있다.
▼러시아의 원유 증산
세계 2대 산유국인 러시아와 사우디 아라비아의 석유 시장 쟁탈전은 2년 전 러시아가 증산 정책을 펴면서 시작됐다.
하루 평균 50만 배럴 증산이라는 무서운 속도였다. 구 소련 붕괴 직후 석유 산업이 민영화하면서 관련 기업들의 생산 경쟁이 달아오르기 시작한 것이다.
러시아 기업들은 1998년 채무불이행 사태까지 몰고 갔던 경제 공황으로 루블화가 이전의 3분의 1 수준으로 저평가돼 수출 가격 경쟁력을 확보하자 증산에 열을 올렸다.
거둬들인 이익을 산유, 운송 등 시설에 재투자해 생산성을 향상시켰다.
지난해 세계 경제 불황에 따른 수요 급감으로 유가가 곤두박질해 OPEC이 3차례에 걸쳐 하루 총 350만 배럴을 감산하는 동안 러시아는 산유량을 꾸준히 늘렸다.
9ㆍ11 테러 이후 중동에 대한 에너지 의존도를 점차 축소하려는 미국과 유럽이 러시아의 생산 확대를 요구했다.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은 2000년 3월 취임 이후 세제 등 각종 구조 개혁을 시행해 외국 자본을 끌어들였다. 세금을 징수하는 대신 기업들에게 최대한의 자유를 허용했다.
▼위기의 사우디
러시아의 증산은 사우디 아라비아에게 명백한 위협이 되고 있다. 시장 점유율을 빼앗겨 사우디의 유가 유지책인 ‘유가 밴드제’가 무력해질 것이기 때문이다.
그 동안 막대한 매장량(전체 25%)과 시장 점유율을 무기로 감산과 증산에 대한 산유국들의 협조를 얻어 온 사우디는 사실상의 유가 결정권을 상실할지도 모른다는 불안에 휩싸였다.
사우디는 그 동안 미국에 한해 배럴당 1달러 싼 가격에 원유를 공급하면서까지 ‘대미 원유 수출 1위국’의 지위를 유지하려 애썼다.
석유 시설은 물론 정권에 대한 미국의 보호와 걸프만의 미군 주둔을 유지하려는 정치적 의도가 컸다. 그러나 러시아로 눈을 돌리고 있는 미국을 막기에는 속수무책이었다.
지난해 OPEC의 막대한 감산에도 유가가 상승하지 않은 것은 사우디의 권위를 땅에 떨어뜨렸다.
1985년, 98년과 같은 유가 전쟁 경고 등 갖은 협박을 하고도 비 OPEC 산유국들의 감산 협조 조차 쉽게 끌어내지 못했다. 마침내 조급해진 OPEC 관료들이 12월 러시아를 수 차례 방문해 감산을 ‘구걸’하기까지 했다.
▼최후의 승자는
전문가들은 석유 권력 쟁탈전의 최후의 승자로 러시아를 점치고 있다.
최근 러시아 최대의 석유기업인 루크오일이 카스피해 인근에서 매장량 50억~750억 배럴로 추정되는 거대 유전을 발견하는 등 러시아의 생산 잠재력이 세계 자본의 관심을 끌고 있다.
반면 중동 지역의 산유량은 20여년 간 서서히 감소, 현재 80년대보다 적은 수준이다.
러시아는 송유관에 대한 지속적인 투자로 2006년까지 하루 200만 배럴의 추가 수출 능력을 확보했다.
최근 완공된 카스피해 송유관과 발트해 송유관을 통해 원유를 유럽 항구 등 수요지로 직접 수송, 효율성을 극대화한 것이다.
사우디의 유일한 국영 석유기업인 아람코가 외로이 고전하고 있는 데 반해 자본주의에 눈 뜬 러시아 민간 기업들의 막강한 생산성은 러시아 석유 붐의 원동력이 되고 있다.
루크오일이 세계 4대 석유회사를 목표로 최근 불가리아, 이탈리아의 정유시설 및 미국내 주유소 1,300여개를 사들이는 등 러시아의 석유 산업은 세계로 팽창하고 있다.
사우디가 세력을 만회하기 위해 유가 전쟁을 촉발시킨다 해도 대세를 꺾지는 못할 것이라는 분석이 지배적이다.
생산량의 대부분을 수출하는 사우디보다 국내 판매와 수출을 병행하는 러시아가 저유가에 대한 저항력이 높기 때문이다. 원유 수출이 전체 수출에서 차지하는 비율은 러시아와 사우디가 각각 50여%와 99%이다.
최문선기자
moonsun@hk.co.kr
■시장 통제력 상실 OPEC 내리막길
1960년 출범 이후 30여년 동안 석유를 무기로 세계 경제를 쥐락펴락했던 석유수출국기구(OPEC)가 위기에 놓였다.
산유량 제한을 통해 시장의 가격 결정자 역할을 해 온 OPEC의 위기가 본격화한 것은 지난해 초부터.
99년 12월 유가가 배럴당 40달러까지 치솟고 세계 경제 활성화 전망이 쏟아지자 러시아 노르웨이 멕시코 등 비 OPEC 산유국들이 그 동안 타산이 맞지 않아 내버려뒀던 유전을 재가동하기 시작했다.
전세계의 원유 생산량이 급증했지만 지난해 초 세계 경제불황이 겹치면서 유가가 가파르게 하락했다.
OPEC이 가격 부양책으로 실시한 하루 350만 배럴의 감산 정책도 효과가 없었다. 오히려 산유량을 줄이는 바람에 비회원국들에게 시장점유율을 빼앗겼고 이것은 OPEC의 영향력 축소로 이어졌다.
회원국들이 감산 결의를 하고도 당장의 자국 이익을 위해 감산 할당량을 제대로 지키지 않아 스스로 위기를 심화시켰다.
세계 최대 석유 소비국인 미국과 유럽이 불안정한 중동의 정치, 군사적 상황 때문에 OPEC로부터의 원유 수입을 꾸준히 줄인 것도 한 요인이었다.
그 동안 비 OPEC 산유국들의 협조를 이끌어내기 위해 사용해 왔던 ‘무제한 증산-유가 폭락-비회원국 항복’의 전술도 더 이상 휘두를 수 없게 됐다.
최근 OPEC 내부에서조차 “OPEC의 시대는 끝났다”는 목소리가 흘러나오고 있다. 아델 알 사베이 쿠웨이트 석유장관은 “우리는 세계 석유시장을 통제할 능력을 상실했다”고 말했다.
그러나 OPEC의 몰락을 속단하기에는 이르다는 견해도 있다.
아직까지 세계 석유 거래량의 약 60%를 생산하고 있고 현재 전세계 석유 매장량의 75%를 OPEC 회원국이 보유하고 있기 때문이다.
최문선기자
moonsun@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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