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일 오전10시 중국 랴오닝(遼寧)성 선양(瀋陽)시 따싱(大興)조선족향의 오가황(吳家荒) 소학교.재중동포 3, 4세들이 다니는 이 학교 운동장에 1년에 한 번 들을 수 있을까 말까 한 풍물소리가 울려 퍼졌다.
선양시 조선족문화예술관(관장 변시홍)과 한민족언어문화진흥회(회장 임무박)가 공동 주최한 ‘민속 풍물놀이 잔치 및 민속악기 기증식’ 행사였다.
선양시 60~70대 재중동포 노인들의 농악무, 선양 제4중학교 재중동포 학생들의 사물놀이 합주에 이어 커다란 박스 12개에 담긴 징 꽹과리 장고 북의 모습이 공개되자, 운동장에 나와있던 김홍아(13ㆍ오가황 소학교 5년)양은 탄성을 질렀다.
“저게 징과 꽹과리예요? 태어나서 처음 보는 악기예요.”
이날 행사는 바로 김양 같은 어린 학생을 위한 자리였다.
중국에도 장구와 북은 널려 있지만 놋쇠를 두들겨 만드는 징과 꽹과리는 그야말로 구전 속의 악기.
중국에는 이 같은 방짜 기술이 없기 때문이다. 재중동포 1세들이 고국 땅을 떠나며 가져왔던 징과 꽹과리, 북과 장고는 이미 망가지고 찢어졌다.
김양 뿐만이 아니었다. 운동장을 가득 메운 재중동포 1,000여 명은 행사 내내 눈길을 돌리지 못했다.
1939년 랴오닝성에서 태어난 재중동포 2세 박기복(63)씨는 “풍물놀이는 매년 10월 이 학교 운동회 때만 볼 수 있는 매우 진기한 행사”라며 “손주 녀석에게 진짜 꽹과리를 보여주기 위해 이른 아침부터 이곳을 찾았다”고 말했다.
경기 용인에서 태어나 8세 때 선양으로 이주, 이날 농악무의 상쇠를 맡은 최종구(67)씨는 “플라스틱이 아닌 진짜 나무로 몸체를 만든 장고는 태어나서 처음 본다”고 감격해 했다.
변시홍 조선족문화예술관장은 “민족의 정이 고스란히 담겨 있는 이 민속악기를 선양시 각 조선족 마을과 단체에 고루 나눠주겠다”고 밝혔다.
진흥회가 재중동포에게 민속악기를 보급해온 것은 2000년 8월부터. 옌볜(延邊)조선족자치주 왕칭(汪淸)현 하마탕(蝦螞塘) 마을을 시작으로 지금까지 지린(吉林)성과 헤이룽장(黑龍江)성의 재중동포 마을ㆍ학교ㆍ단체 150여 곳에 민속악기 500여 세트를 기증했다.
랴오닝성 기증사업은 선양이 처음. 앞으로 다이롄(大連) 푸순(撫順) 등도 차례로 방문할 계획이다. 박윤구 진흥회 사무총장은 “2000년 여름 지린성 일대를 방문한 결과 마을의 촌로조차 민속악기를 말로만 들었다고 해 충격을 받았다”며 “내년 11월까지 동북 3성의 기증사업을 완료한 다음 2004년부터 러시아 연해주의 고려인 마을로 사업범위를 확대하겠다”고 말했다.
이 같은 사업확대를 위해 절실한 것은 국내 기업과 정부의 적극적인 지원. 이날 민속악기 기증식을 후원한 기업은 ㈜두산중공업과 ㈜세원텔레콤 단 두 개사에 불과했다.
나머지는 개인 회원 200여 명이 십시일반한 것. 진흥회 후원회장을 맡고 있는 여무남 대한역도연맹회장은 “우리 선열이 잠들어 있는 중국과 러시아에서 더 많은 꽹과리와 징 소리가 울리려면 정부와 뜻 있는 기업들의 전폭적인 지원이 뒤따라야 한다”고 강조했다.
김관명기자
kimkwmy@hk.co.kr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