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는 서울 토박이인데도 분위기는 전혀 도회적이지 않았다. 엄격한 시골 교장 선생님 같은 인상도 그렇고, 말투도 느릿느릿하고 약간은 어눌하게 들렸다. 우직하면서도 고집스러워 보이는 그의 스타일이 이번 이용호(李容湖) 게이트 수사방식과 닮았다는 생각이 들었다.전례없는 국민의 지지 속에 장장 105일에 걸친 수사를 성공적으로 마무리한 차정일(車正一·60) 특별검사를 26일 아침 서울 강남구 청담동 집에서 만났다. 한 시간 정도의 길지 않은 인터뷰를 마쳤을 때 부인 유옥순(57)씨는 웃으며 “평생 살면서 남편이 이렇게 말을 많이 하는 것은 처음 보았다”며 신기해 했다.≫
/대담=이준희 사회부장
- 오늘 아침 몇 시에 일어났나. 수사기간 내내 오전 6시 기상, 8시30분 사무실 도착으로 ‘칸트’라는 별명까지 얻었는데.
“잠이나 푹 자려 했는데 습관이란 게 무서워서 7시에 눈이 떠 지더라. 당분간 쉬면서 산에도 오르고, 친구들도 만날 생각이다. 그동안 수사 관계자 외에는 아무도 만나지 않으면서 수도승 같은 생활을 했다. 건강도 많이 상했다.”
- 가장 성공적 특검이라는 평가를 받았다. 요인이 뭐라고 생각하나.
“무엇보다 팀워크다. 팀 전원이 사명감과 역사적 소명의식을 갖고 혼연일체가 돼 일했다. 직접 한명 한명 인선한 뒤 인화에 각별히 신경썼다. 훌륭한 이들과 일하게 된 건 복이다. 수사 기술 측면에서는 압수수색과 계좌추적을 통한 물증 확보에 성패가 달렸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계좌추적팀을 2명씩 4개반으로 구성, 집중 활용했다.”
- 이상수(李相樹)·김원중(金元中) 두 특검보는 이전부터 알았던 이들인가.
“이 특검보는 내가 서울지검 북부지청 특수부장 때 함께 일했고, 김 특검보는 일면식도 없었지만 평판이 좋았다. 판·검사를 거치지 않은 것도 장점으로 봤다. 홀가분한 입장에서 수사할 수 있으니까. 진흙 속에서 발견한 보배다.”
- 구체적인 수사 얘기를 해 보자. 가장 보람 있었던 점을 꼽는다면.
“사건 자체야 주어진 임무를 충실히 수행하면 되니까···. 국민들이 성원을 많이 해준 게 정말 고마웠다. 격려편지, 전화, 위문품 등이 많이 답지했다. 언론도 격려해주고 성원해주는 식이어서 큰 힘이 됐다.”
- 반면에 아쉽다고 생각되는 부분은.
“이용호씨나 여운환(呂運桓)씨 같은 사람들이 입을 조금이라도 열었으면 더 많은 일을 할 수 있었을 텐데 전혀 열지 않았다. 이를테면 이수동(李守東) 전 아태재단 이사는 돈을 받았다고 하는데 이용호씨는 끝까지 주지 않았다고 우기는 식이다. ”
- 큰 수사를 하다보면 고비가 한번쯤은 있게 마련이다. 이번에는 언제였나.
- “역시 신승환(愼承煥)씨를 구속할 때였다. 당시에는 100% 무혐의를 자신한다는 게 검찰 입장이었으니까. 또 총장의 동생이기 때문에 검찰이 무너지면 안된다는 생각에 촉각을 곤두 세웠다. 그래서 파견검사 등 검찰 공무원들을 수사에서 배제하고 변호사팀에 맡겼다. 그런데 이들은 수사 경험이 적어 내가 직접 챙길 수 밖에 없었다. 이 고비를 넘기고 부터는 수사가 물 흐르듯 잘 진행됐다.”
- 당시 검찰에서는 친정에 너무 심한 것 아니냐는 등의 불만이 거센 분위기였는데.
“신씨 구속 당시에 그랬다. ‘표적 수사 아니냐’는 반응도 나왔다고 들었다. 그렇지만 직접 전화받은 건 없었고, 이후로는 일체 말이 없었다. 어쨌든 마음은 편치 않았다. 신씨가 구속된 날 술을 많이 마셨다.”
- 처음 수사 착수 때 방향을 크게 정·관계 로비, 검찰 압력 의혹 두 가닥으로 잡았다. 후자는 아무래도 아쉬운 부분이 있지 않나.
“그 부분에 대해 특별히 소홀히한 점은 없다. 지난해 검찰의 특별감찰본부 조사가 가혹할 정도로 잘 돼 있었다. 수사기록이 ‘퍼펙트’한 수준이라 더 이상 나올 게 없었다. 단지 임양운(林梁云) 전 광주고검 차장의 공무상 비밀누설혐의 부분은 좀 미흡했다. 임 전 차장으로부터 이용호씨의 수사사실을 전해들은 윤명수라는 사람이 일본에 있어 내사중지를 했다.”
- 이수동 전 이사 집을 압수수색하는 과정에서 발견된 해군 참모총장 인사청탁 등에 대한 보도 이후 예정에 없던 중간수사결과를 발표했는데 여기에서 군 인사, 정치·언론개혁 등의 문서도 공개됐다. 이걸 두고 특검법상 수사범위를 벗어난 것이라는 지적도 있었다.
- “언론이 너무 과열돼 있었다. 엉뚱한 보도도 나오고···. 또 이 전 이사가 팀원을 고소하는 것을 보고 자칫 오보로 고소가 늘 것을 우려했다. 때문에 수사상황을 있는 그대로 밝힐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다. 특검법에도 중간수사결과를 발표할 수 있도록 돼 있다. 수사범위와 관련해서는 이의신청을 두번 받았지만 모두 정당한 범위라는 고등법원의 결정을 받아냈지 않은가.”
- 특검제 상설화에는 줄곧 반대입장을 표명해 왔다. 여전히 변함이 없나.
“법적 수사기관은 어디까지나 검찰이다. 검찰이 신뢰를 못 받으니까 특검이라는 비상수단을 강구한 것 뿐이다. 검찰이 신뢰받는 일본에서 특검제 말이 나오느냐. 다만, 고도의 정치적 사건이나 권력형 비리 등은 특검이 수사할 수 있도록 법을 만들고 사안이 발생하면 국회의결을 거쳐 그때그때 팀을 꾸리도록 하는 건 바람직하다.”
- 이기호(李起浩) 전 청와대 경제수석을 소환했을 때 정가에서는 ‘핵심’ 얘기까지 나왔다. 그 때 특검의 스탠스가 흔들렸다는 시각도 있었는데.
“모든 것을 철저하게 밝히자는 생각 뿐이었으나, 당사자들이 결사적으로 입을 다물었다. 할 수 있는 데까지는 추궁했다.”
- 앞서 말했듯 검찰에 대한 국민의 신뢰가 많이 떨어진 상황이다. 선배로서 조언한다면.
“검찰을 살리는 데 가장 중요한 것은 인사다. 능력과 사명감을 가진 검사들이 일할 수 있는 풍토가 돼야 한다. 정치검사라고 할까, 일부 그런 사람들이 문제다. 정권에 줄을 대고 스스로 정권의 활용대상이 되기를 원하는 사람들이 요직을 차지해서야 말이 되느냐. 검사들도 검사직 자체에 자부심을 가져야 한다. 어떤 보직은 좋고 어떤 것은 시원치 않고, 이런 생각부터 버려야 한다.”
- 최경원(崔慶元) 전 법무장관, 박순용(朴舜用) 전 검찰총장, 안강민(安剛民) 전 서울지검장 등이 사시 동기(8회)다. 차 특검 같은 분이 일찍 퇴진한 것이 검찰 인사의 문제점을 보여주는 단적인 사례라는 의견도 있다.
“대검 중수부 과장시절 조사받던 국세청 사무관이 목을 매 자살을 기도했다가 미수에 그친 일이 있었다. ‘불명예스럽게 사느니 죽는게 낫다’는 유서를 쓰고. 대검 차장에게 ‘내 책임이니 사표를 쓰겠다’고 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고 대신 부산지검 형사부장으로 좌천성 인사를 당했다. 이때부터 뒤쳐지기 시작했다고들 하는데 그건 아니다. 안강민, 박순용 등과 서울지검 부장검사에 같이 올라갔다. 그런데 또 생각이 달라지더라. 차장검사부터는 사실상 관리자여서 소신껏 일하기 힘드리라는 생각이 들었고, 애들이 커서 공부도 시켜야 하는데 월급으로는 부족하고(웃음)··· 여러 복합적인 원인으로 그만 뒀다.”
- 변호사로서 석달 이상 사건 수임도 못하고 특검 봉급도 수사비로 다 내놓았다는 데, 금전적으로는 얼마나 손해를 본 셈인가.
“일부 언론에서는 나를 재력가로 묘사했는데 그렇지 않다. 원래 개업 후 6개월~1년 반짝하는 것 아니냐. 사표내고 고교, 연수원 동기인 부장판사 출신의 홍석제 변호사와 개업했다. 당시만 해도 판·검사 출신이 함께 개업한 예가 거의 없어 인기를 끌었다.
그러다 홍 변호사가 교통사고로 사망했다. 충격을 받아 교환학생이 된 딸을 따라 캐나다에도 1년 가 있었고···. 이후에 다시 변호사 생활을 하면서는 의뢰인이 주는 대로 100만원도 받고, 200만원도 받았다. 먹고 살수는 있으니까 지금 상황에서 돈이 중요한 것은 아니다.”
- 앞으로 또 다른 특검팀이 구성돼도 다시 차 특검이 맡아야 한다는 여론조사 결과도 있었는데.
“그럴 가능성이 있겠느냐. 한 사람이 자꾸 하면 식상한다. 새 술은 새 부대에 담아야지.”
정리=박진석기자
jseok@hk.co.kr
■약력
▲서울 ▲서울고·서울대 법대 ▲사시8회 ▲부산·대구·서울지검 검사
▲대검 중수부 4과장 ▲부산지검 형사부장 ▲서울지검 북부지청 특수부장 ▲서울지검 공안부장 ▲변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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