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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자,수필을 쓰다 / 공주와 시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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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자,수필을 쓰다 / 공주와 시종

입력
2002.03.27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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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 따라가지 말았어야 했다. 하느님을 열심히 믿으면서도, 사주나 운명 또한 지나칠 정도로 믿는 여자.처음에는 이해가 안됐다. 그러나 결혼하고 얼마되지 않아 그 이유를 알았다. “귀가 얇아서 그렇구나.”

얇은 귀는, 용하다는 점쟁이는 물론 엉터리 도사의 말까지 모두 믿었다. “당신, 올해만 참아, 그러면 아무 걱정 없대.”

그날도 의정부 어느 집에 가보자고 졸랐다. 누구에게 들었는지 용한 사람이 있어 운세도 잘 보고, 민간요법으로 정신적 스트레스나 막힌 기운을 잘 풀어준다는 것이었다.

일요일 아침, 물어 물어 골짜기의 외딴집을 찾아갔다. 방안에 이상한 색종이나 불상이 없는 것을 보니 완전 사기꾼은 아니군.

주역에 심취하다 어느 날 신내림을 받았는지, 아니면 어릴 때 할머니가 체하면 손가락 따주던 것을변주한 것인지 모르지만 50대 남자.

천천히 조용히 맥을 짚어보더니 “스트레스가 많죠. 그 때문에 기(氣)가 막혔어요” 하면서 바늘뭉치로 열 손가락, 열 발가락을 마구 찔러 피를 빼내면서 “시원하죠”라고 물었다.

“이 세상에 스트레스 없이 사는 사람이 어디 있어요”라는 퉁명스럽게 대답하고 말았는데 그 ‘스트레스’에 바로 내 운명이 들어있을 줄이야.

“아내가 아무 것도 하지 않아도, 무슨 일을 해도 절대로 반대하거나 화내지 마세요. 된장찌개를 엎어도 ‘잘했어’라고 말하세요. 운명이려니 생각하세요. 그래야만 당신도 살고 부인도 삽니다.”

이 무슨 소리. 아내가 나 몰래 왔다간 적이 있나. 분명 처음이라고 했는데. 그 남자의 말이 이어졌다.

“부인은 공주, 그것도 많은 사람들에게 나눠주고 싶지만 가진 것이 없어 속상한 공주이고 당신은 그의 시종의 운명을 타고났습니다. 그러니 무조건 봉사하세요. 절대 화내지 마세요. 그렇다고 부인이 달라지지도, 당신의 삶이 바뀌지도 않습니다.”

^아! 그랬구나. 집안 일 팽개치고, 물건 쓰고 아무데나 놓고, 일요일 아침마다 내가 죽어라고 청소하면 “난 책이나 읽을게”라며 먼지를 피해 베개 들고 방으로 들어가고, 그나마 해 놓은 빨래 개지도 않고 아침마다 “내 속 옷 어디에 있어”라고 말하는 것이 ‘남편 길들이기’ 작전이 아니구나.

그냥 그렇게 사는 게 당연하다고 생각하는구나. 헉헉대며 걸레질하고, 끝나자마자 화분에 물주고… 그런 모습을 보고 미안해 하기보다는 신기하다는 듯 “당신은 전생에 소였나 봐”라고 말하는 여자.

돌아서는데 남자가 살짝 불러 세워서는 앞서 가는 아내가 들리지 않게 말했다. “다음 생애에서는 하녀하고 결혼하세요”라고. 그리고는 혼자 중얼거렸다.

“공주하고 사는 것도 좋은 것만은 아니군.”

시종이라? 아니면 집사로 살아갈 운명.

그러자면 영화 ‘남아있는 나날’(감독 제임스 아이보리)의 앤서니 홉킨스처럼 너그럽고 차분해야 하는데. 성격 급하기로는 둘째가라면 서러운 인간이니 장차 이를 어찌할꼬.

그래, 그 남자의 말처럼 다음 생애에서라도 하녀와 결혼해 왕처럼 군림해 지금의 이 불쌍한 인생을 보상 받자. 폭군으로 평생을 살며 어머니에게 삶의 의미를 잃어버리게 만든 아버지처럼? 안돼!

“여보, 난 다음에는 저 깊은 산 속의 나무로 태어날래.” “그래, 그러면 난 예쁜 새로 태어나 거기서 놀게.” “으악!”

이대현 문화부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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