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낙윤(成洛允ㆍ72)씨는 환갑을 맞은 해인 1993년 큰 아들이 운영하는 레포츠업체 ‘스카이 라이더스’에서 처음 패러 글라이딩을 배웠다.10년째1주에 2~3회는 인천 소래포구 등지에서 패러 글라이딩을 즐기며, 동력 행글라이더로 서울에서 부산까지 비행할 꿈도 키우고 있다.
정년 이후 취미 생활로 패러 글라이딩을 배우고 싶은 실버들을 위해 인터넷 홈페이지(myclub-www.korea.com)도 개설했다. 현재 서울 양천구 신월동에서 부인 이천승(李千丞ㆍ66)씨와 오순도순 살고 있다.≫
나는 정년이란 말을 믿지 않는다.
월급받는 직장생활보다는 굶어 죽더라도 내 일을 해보고 싶어 일흔 두 살인 이 나이에도 아직 조그마한 일을 하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나이가 들수록 전에는 몰랐던 인생의 새로운 재미를 새록새록 깨달아가기 때문이다.
‘살고자 하면 죽을 것이요, 죽고자 하면 살 것이다.’ 이 말의 의미는 정말 나이가 들어서야 알게 됐다.
죽음이 두려웠던 젊은 시절엔 ‘무슨 일이든 죽을 각오로 하면 반드시 된다’는 내 최면제 역할을 했던 이 말이, 죽음을 받아들여야 할 나이가 되니 인생과 삶에 대한 눈뜸으로 해석되니 말이다. 공포는 눈을 멀게 한다더니, 좋은 말씀은 그르칠 게 없는 법이다.
10여년 전인가 큰 아들이 갑자기 회사를 그만두겠다고 했다. 10년 넘게 일본 땅에서 며느리와 갖은 고생을 해가며 배운 공부로 이제야 자리를 잡았다 싶었는데, 갑자기 회사를 그만두고 자기 사업을 해보겠다고 했다.
오십이 넘어서면서 손대던 사업마다 시원치 않았던 나는 거의 빈털터리로 환갑을 맞았고, 사업 병에 걸려 한평생 가족을 고생시켰던 나의 전철을 아들놈이 다시 밟게 될까 두려웠다.
하지만 내심 핏줄은 속일 수 없는 모양이라는 생각이 들어 더 이상 아들을 막을 수 없었다.
그 아이가 시작한 사업이 요즘 유행하는 레포츠 활동인 ‘패러 글라이딩’이다. 당시 하는 일이 별로 없어 경로당이나 들락거리던 나는 아들의 권유로 패러 글라이딩을 시작하게 됐다.
원래 패러 글라이딩은 부상 위험이 상대적으로 높은 스포츠인지라, 나이 든 내가 젊은이처럼 할 수 있을지 걱정됐다.
하지만 간단한 안전 수칙과 조작 요령을 듣고 아들과 함께 하늘을 처음 날았을 때의 감동은 내 자신에 대한 모든 의심과 두려움을 떨치게 해주었다.
마치 새가 되어 나는 듯, 하늘에서의 내 몸과 마음은 한없이 자유로웠고, 무엇이든지 할 수 있을 것 같다는 자신감으로 충만하기 시작했다.
패러 글라이딩을 하게 된 지 한 6개월 후부터는 새로운 회원들을 교육시키는 역할도 맡게 됐다.
대부분 젊은이들인 신입 회원들은 나이든 내가 과연 제대로 가르칠 수 있을까 의심스러워 하는 눈치였지만, 내가 직접 시범을 보이면 그들의 눈빛은 곧 존경과 동경으로 바뀌어 갔다.
또 젊은이들과 어울려 생활하는 기회가 많아지다 보니, 세상에 대해 더욱 많은 것을 새롭게 배우고 느낄 수 있게 됐다.
세상은 끊임없이 변화하고 앞으로 나아가는데, 나는 그렇지 못했던 것이다. 전에는 변하는 세상을 탓하였지만, 오히려 모든 만물은 변한다는 사실이 변치 않는 세상인 것이다.
이런 면에서 오히려 변한 건 나였다. 변화에 대한 두려움으로 내가 가진 것과 지난 것에만 매달려 있었으니 말이다.
인생을 마무리해야 할 나이에 오히려 인생의 새로운 자신감을 얻게 되다니. 이 무슨 아이러니일까 싶기도 했지만, 남은 삶을 보다 충실히 해보고 싶다는 의지는 더욱 더 강해질 뿐이었고, 급기야 친구들과 함께 조그만 사업을 다시 시작할 수 있게 됐다.
이제는 손자 재롱이나 보고, 소일하며 쉬어야 할 때 무슨 사업이냐고 손을 내 젓던 친구들도 얼마 지나지않아 무기력함과 두려움에 찌들어가는 자신들을 발견하고 다시 연락 해왔다.
무엇이든 해 보자는 것이었다. 큰 돈을 벌고 싶은 욕심도 아니고, 잃었던 명예를 되찾아 보겠다는 욕심도 아니었다. 그저 이제야 알게 된 인생의 참 맛을 스스로 놓고 싶지는 않았던 것 뿐이다.
친구들과 시작한 사업은 나와 친구들의 경험을 살릴 수 있는 것으로, 자본이 별로 들지 않는 종목으로 결정했다. 친구의 후배가 하고 있는 사업체의 투자자로 참여하고, 인맥과 경험을 활용해 거래처를 넓혀가는 것이 우리가 하는 일이다.
일주일에 사흘은 회사 일을 챙기고, 이틀은 패러 글라이딩을 타러 가거나, 친구들과 산행을 하고, 나머지 날들은 집을 찾아오는 친척이나 손자들과 함께 하고 있다.
무엇보다 기쁜 일은 아들딸에게 의지하지 않고, 손자들의 용돈과 우리 부부의 생활, 여가를 넘치지도 부족하지도 않게 즐길 수 있다는 점이다.
내 주위의 동년배 사람들이 자식들의 미미한 실수나 무신경에도 크게 상처 받는 경우를 종종 목격하곤 한다. 나는 그들에게 이렇게 말해주고 싶다.
“아프고 힘들다고 해서 자꾸 주눅들다 보면, 당신이 할 수 있는 일은 죽을 날을 기다리는 것 뿐이라고…. 자녀들에게 경제적으로 의지한다고 해서 정신적으로도 의지하게 되면 그것처럼 자식들에게 못할 짓은 없는 것이라고….아직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많다는 걸 믿고 스스로 서 보도록 노력하라고…. 인생은 생각보다 길다고….”
지난 해 자식들이 해준다는 칠순 잔치를 마다하며, 나는 이렇게 말했다. “사람들은 지난 칠십 평생을 마치 자기 자신의 모든 인생인양 세월의 빠르기가 화살과 같다고 한다. 그러나 나는 아직 갈 길이 먼 인생이니 내 인생을 여기서 끝내려 하지 말아라.”
자식들은 아버지의 정정함에 기뻐하는 것도 같고, 한편으로는 나이 먹은 노인네가 편하게 지내시면 될 걸 왜 저러는지 모르겠다는 듯도 보인다. 하지만 난 자유로운 걸 어찌하란 말인가?
*'나의 정년 이후' 는 실버 세대들의 원고로 꾸며집니다. 은퇴 후 새로운 일을 시작했거나, 봉사와 취미활동을 통해 다양한 삶을 개척하고 있는 활기찬 노년의 이야기를 e메일과 팩스, 편지를 통해 전해주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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