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보건기구(WHO) 역점 사업 중 하나로 세계 최초의 건강 관련 국제협약이 될 담배규제 기본협약(FCTC) 제정이 주요 담배 생산국들의 반대로 또다시 미뤄지게 됐다.지난 주 초부터 스위스 제네바에서 열린 FCTC 제정 제4차 협상은 6일 동안 난상토론이 이어졌지만 별다른 결론을 얻지 못한 채 23일 폐막했다.
연간 3,300억 달러에 이르는 담배 시장을 고수하려는 담배 회사들을 배후에 둔 주요 담배 생산국과 전세계적인 금연 열풍에 고무되어 흡연 퇴치에 발 벗고 나선 WHO의 싸움은 당분간 계속될 전망이다.
▼미국 독일 일본 3국이 담배의 ‘악의 축’
이번 협상에서는 지난 해 2월 초안 마련 이후 2차례 회의를 거쳐 각국이 제안한 수정안에 대한 문안 절충 작업이 집중적으로 이뤄졌다. 하지만 규제 범위와 대상이 너무 방대한 데다 ▦담배세 인상 ▦보조금 감축 ▦담배 회사의 보상ㆍ책임 등 핵심 의제에 대한 의견 대립이 전혀 좁혀지지 않았다.
191개 회원국 대표 가운데 유럽연합(EU)을 비롯해 아프리카 국가들과 태국 팔라우 등이 엄격한 WHO의 규제 초안을 강력히 지지했다. 주요 담배 생산국인 미국 영국 독일 터키 일본 쿠바 등은 규제 내용이 너무 엄격하다며 이견을 표시했다.
특히 각국은 세계무역기구(WTO) 등에서 ‘담배와 관련한 다른 국제 합의가 이루어지더라도 FCTC에 따른 규제가 우선’이라는 문안 삽입을 놓고 격론을 벌였다.
WHO는 10월 14~25일 제네바에서 5차 협상을 가진 뒤 내년 2월 중순께 FCTC안 제정을 완료하고 2003년 5월부터 서명ㆍ비준을 거쳐 발효한다는 목표다.
하지만 뚜렷한 돌파구를 마련하지 않는 그때까지 협약 제정은 어려울 것이 거의 확실하다. 협상에 참가한 비정부기구인 ‘기본협약연합’(FCA)은 폐막 직후 협약 제정에 제동을 건 미국 독일 일본 3개국을 담배의 ‘악의 축’ 국가로 규정하는 등 비난을 아끼지 않았다.
▼흡연 퇴치 고삐 죄는 WHO
FCTC 초안은 담배세 인상을 비롯해 ▦18세 미만의 청소년을 겨냥한 모든 형태의 직ㆍ간접 담배 광고 금지 ▦자동판매기 이용 등 판매 촉진 행위 규제 ▦담배회사의 스포츠ㆍ문화 행사 후원 불허 등의 내용을 담고 있다. 한 갑에 20개비 미만을 포장한 담배 판매와 담배 낱개 판매 금지도 포함하고 있다. 또 담배 제조회사의 보상과 책임에 관한 내용을 포괄 규정하는 방안도 추진되고 있다.
연간 흡연에 따른 사망자수를 400만 명 이상으로 추산하는 WHO는 최근 들어 흡연 피해 관련 소송에도 집중하고 있다.
WHO는 미국 등에서 담배 피해 소송 승소율이 늘고 있는 데 고무돼 담배 회사들을 상대로 손해 배상을 청구하는 나라들에게 전문 지식을 제공해 소송을 돕기로 결정했다.
하지만 역풍도 만만치 않다. 필립 모리스, BAT, 일본 토바코 등 세계 3대 담배 제조사들은 지난해 말 청소년 등 비흡연자를 대상으로 한 담배 광고를 자율 규제키로 합의, 국제적인 비난의 칼끝을 피해가고 있다.
순한 담배라는 인상을 주어 흡연을 조장한다는 이유로 ‘마일드’ ‘라이트’ 같은 표현을 쓰지 못하게 하려는 WHO의 규제안은 WTO의 무역관련지적재산권 협정과 배치되어 두 기구 간 분쟁이 발생할 소지도 안고 있다는 지적이다.
김범수기자
bskim@hk.co.kr
■한국 말보로맨 상 "담배회사 입장두둔"
세계 50여개 국 75개 비정부기구(NGO)로 구성된 ‘다국적 담배회사의 책임을 묻는 네트워크’(NATT)는 22일 한국을 ‘말보로 맨(Malboro Man)’ 수상 국가로 뽑았다고 밝혔다.
이 상은 세계보건기구(WHO)가 추진하는 담배규제 기본협약 제정 과정에서 담배회사의 입장을 두둔하거나 흡연 규제 노선과 동떨어진 발언을 하는 각국에 압력을 넣기 위해 만들어졌다.
NATT는 한국이 이 협약 이행 방법을 논의하는 자리에 담배회사를 참여시켜야 하고 NGO가 협약 이행에 대한 공식 감독을 허용해서는 안 된다는 의견을 냈기 때문에 이 상을 준다고 설명했다.
파키스탄과 도미니카도 선정됐다. ‘말보로 맨’은 세계 최대 담배회사 필립 모리스의 대표 상품인 말보로 담배 광고에 등장하는 카우보이이다.
/제네바=연합
■흡연자유족에 1억5,000만달러 배상 판결
미국 법원은 22일 거대 담배 제조업체인 필립모리스에 대해 저(低)타르 담배가 중독이 덜하며 암 예방에 도움이 된다고 믿고 피우다 사망한 흡연자의 유족에게 1억5,000만 달러를 배상하라는 판결을 내렸다.
미 오리건주 포틀랜드 지방법원은 필립모리스가 소비자들에게 저타르 담배를 안전하며 흡연을 줄이기 위한 대안품으로 홍보하는 부주의와 부정행위를 저질렀다며 이 같은 조치를 내렸다.
이번 사건은 35년간 흡연한 남편이 1999년 폐암으로 사망하자 부인인 미쉘 슈와츠 여사가 필립모리스를 상대로 소송을 제기하면서 촉발했다..
법원의 판결에 대해 필립모리스는 "이번 판결은 사실과 법률에 합당치 않다"면서 항소하겠다고 밝혔다.
/워싱턴=연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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