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록 중소업체였지만 봉급으로 ‘입에 풀칠할 걱정’은 없었던 K씨(45세). 1년전 증권사에 다니는 친척으로부터 “확실한 주식이 있다”는 말을 듣고 21평 아파트(당시 시가 9,000만원)를 담보로 4,000만원을 빌리고, 신용으로 3,000만원을 대출 받았다.그러나 K씨가 찍은 종목은 6개월여만에 반토막 나버렸고 한동안 잘 갚던 이자도 연체하기 시작했다. 그는 결국 신용불량자 낙인이 찍혀 대출은 물론 신용카드 결제도 어렵게 됐다.
K씨처럼 신용불량자로 등록돼 금융 활동에 제약을 받고 있는 사람은 2월말 현재 246만2,000명. 2000년말보다 39만명이 늘어, 이제 15세 이상 경제활동인구 10명중 1명이 신용불량자다.
지난해부터 가계대출이 비정상적으로 늘어나면서 가계부실이 이미 위험수위까지 차 올랐다는 우려가 확산되고 있다.
주가 부동산가격 금리 중 한 고리만 무너져도 국민 경제가 내려 앉을 갈림길에 들어섰다는 지적이다. 일본의 전철을 밟을 것인지 경계선상에 들어왔다는 얘기다.
◈ 덫이 될 것인가 경제 버팀목으로 남을 것인가
지난해 우리 국민들이 은행에서만 빌린 돈은 44조8,267억원으로 2000년(26조3,582억원)의 두배 수준. 2년동안 한 가구당(4인 기준) 650여만원씩 빚을 져, 잔액기준 가구당 부채는 2,310만원에 달한다. 물론 감당할 수 있는 부채는 소비와 투자를 늘려, 소득이 다시 증대되는 선순환을 가져온다.
그러나 보유자산이나 소득에 비해 부채가 과도하게 누적되면, 자산가격이 급락하거나 금리가 급등할 경우 가계를 망치고, 금융기관을 부실화시켜 국가 경제의 발목을 잡게된다.
이는 일본의 ‘잃어버린 10년‘의 교훈이기도 하다. 일본은 정부의 강력한 경기부양과 금융기관의 공격적인 대출로 1985년부터 5년간 주가는 3배, 지가는 4배가 뛰었다.
당시 일본 은행들은 부동산 담보가액의 120%까지 대출했다. 그러나 90년 일본 정부가 금리를 인상하는 등 초긴축정책에 돌입하면서 자산가격은 급락했고, 이결과 신용경색과 경기침체로 점철된 10년을 불러왔다. 90년 1만1,275명이었던 개인파산자는 2000년 14만명으로 10배 이상 폭증했다.
우리나라도 은행의 가계대출 연체율이 작년말의 두배로 급증하고, 파산신청 건수가 역대 최고치인 1999년(263건)에 육박하는 등 가계부실의 조짐이 확인되고 있다.
전문가들은 우리 경제가 ‘가계 부실→경제의 덫’이라는 일본의 전철을 밟느냐 마느냐의 기로에 서 있다고 경고했다.
대출급증에도 불구, 가계붕괴를 막는 안전판 역할을 해왔던 저금리가 최근 급상승 기미를 보이고 있다. 이미 가계부실의 뇌관인 신용카드 연체율은 9% 수준으로 일반 가계대출 연체율의 4~5배 수준. LG경제연구원 송태정(宋泰正) 책임연구원은 “가계대출이 우리 경제가 소화할 수 있는 한계치에 임박했다” “가계부실화가 본격화하면 소비 둔화를 초래, 경기회복에 찬물을 끼얹는 결정적 계기가 될 것”이라고 경고했다.
◈ 문제는 무엇인가
아무리 저금리 시대라 할 지라도 빚을 안 얻어 쓰면 바보인 것처럼 만들어 버린 은행들의 과당 경쟁때문이다. 기업대출에 비해 수익성ㆍ안정성이 높아 너도 나도 달려든 것이다.
금융기관들은 은행권의 총대출 가운데 가계대출 비중이 43.4%로 미국(52.5%)에 비해 아직 낮다고 주장하지만, 전문가들은 동일선상에서 비교해서는 안된다고 반박하고 있다. 미국의 53%는 철저한 신용 분석에 기초한 것이지만 우리나라의 43%는 주먹구구식 대출이라는 것.
작년 중반이후 금융기관들은 정상적인 가계대출이 포화상태에 이르자 휴대폰을 소지했거나, 신용카드 발급 실적이 있는 사람, 공과금 납부실적이 있는 사람들이라면 정식 여신심사 없이 경쟁적으로 대출 세일에 나섰다. 2000년말까지만 해도 시가의 60% 수준이던 주택담보대출한도도 80~90%까지 올라갔다.
금리가 본격 상승하면 신용이 한계선상에 있는 대출에서부터 연체가 발생에 금융 전 부문으로 확산될 수밖에 없다. 부동산가격이 하락, 시가가 담보가치 아래로 떨어지면 신용으로 물어내야 하고, 그래도 안되면 담보주택은 경매 처분된다.
금감원 관계자는 “담보대출 한도를 90%까지 올린다는 것은 결국 은행이 서민들의 집을 강제로 빼앗겠다는 심사”라고 지적했다.
금감원은 신용대출에 대해 신용심사를 강화할 것과 주택담보대출에 대해 신용에 따른 차등금리 적용, 대출한도 하향조정 등을 요구하고 있지만 대부분 은행들은 여전히 고객 확보만 염두에 둘 뿐이다.
금융연구원 최공필(崔公弼) 박사는 “개인이 전 금융권에서 받을 수 있는 여신한도를 설정하고, 담보비율도 하향조정하는 등 가계여신 관련 규정을 대폭 강화해야 한다”며 “특히 카드사의 무분별한 발급에 대해서는 감독당국이 공권력까지 동원해야 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유병률기자
bryu@hk.co.kr
■"아직은 감당할 수준" 일부선 낙관론
부동산 및 주식 등 자산가격 거품이 꺼질 경우 과도한 가계대출은 곧바로 신용불량자 양산과 가계 파산의 급증을 불러올 것이라는 우려의 목소리가 갈수록 높지만 한편에선 이 같은 우려가 과잉반응이라는 견해를 내놓고 있다.
현재 총대출에서 차지하는 가계대출 비중이 49.9%로 미국의 60%(2000년)보다 낮고, 은행 가계대출 연체율 역시 1.21%(2001년말)로 미국의 2.8%보다 낮다는 근거에서다.
제진훈 삼성캐피탈 사장은 “1인당 국민소득 1만달러에 도달한 1975년의 미국, 1979년의 일본에서도 소매금융이 폭발적으로 성장했다”며 “우리나라도 같은 패턴을 밟고 있으며 2005년까지 가계대출이 700조까지 성장할 것”이라고 말했다.
제 사장은 “향후 5년내 전금융권 가계대출 시장이 2.5~3배 성장할 것을 감안하면 우리나라 소매금융은 아직도 초기단계”라며 가계부실 우려가 과잉반응이라고 지적했다.
은행권도 가계대출이 기업대출보다 안전하며 가계일부가 파산하더라도 나라경제에 큰 영향을 미치지 않을 것으로 보고있다.
그러나 은행과 2금융권을 제외한 대부분의 전문가는 가계대출 증가를 걱정하고 있다. 삼성경제연구소는 “가계대출이 급증한 상태에서 자산가격이 폭락하면 신용불량자 양산ㆍ은행부실화→소비위축→신용경색→경기침체로 이어질 것”이라며 “일본이 1990년대 초 버블붕괴 이후 장기불황이 지속되는 것도 같은 맥락”이라고 강조했다.
전철환 한국은행 총재는 “가계부채의 절대규모는 걱정할 수준이 아니지만 연평균 20%가 넘는 증가속도는 우려할 만한 수준”이라고 지적했다.
남대희기자
dhnam@hk.co.kr
■'대출카드'변질 신용카드가 가계부채 주범
무분별한 가계부채 증가의 뒤에는 ‘신용카드’가 있다. 잘만 긁으면 백만원에서 수 억원이 터진다는 카드 복권제나 두둑한 연말소득공제 혜택도 카드 빚을 늘리게 하는 요인이다.
소비를 진작시켜 경기회복을 앞당기고, 모든 상거래를 투명하게 만들겠다는 정부의 카드활성화 정책이 엉뚱한 부작용을 낳고 있는 것이다.
유럽이나 미국 등 선진 외국에선 신용카드 사용의 80%가 물품구매(신용거래)인 데 비해 우리나라는 정반대로 돈을 빌려 쓰는 현금서비스나 카드론이 압도적이다.
현금 사용을 줄이자고 만든 카드가 오히려 현금 융통의 수단으로 변질된 셈이다. 신용카드가 가계부채 증가의 ‘주범’으로 지목되는 이유다.
21일 여신금융협회와 카드업계에 따르면 지난해 우리 국민들의 신용카드 이용금액이 무려 443조3,674억원(카드론 37조3,097억원 제외)에 달했다.
연간 카드사용액은 외환위기 때인 1998년 63조5,500억원으로 급락했다가 99년 90조원대로 증가한 데 이어 2000년 200조원을 돌파하더니 지난해 다시 두 배 이상 폭증한 것이다.
문제는 연 금리가 20%를 훨씬 웃도는 카드대출의 증가 추이다. 현금서비스의 경우 97년 전체 카드사용액의 47.1%이던 것이 98년 51.5%, 99년 53.0%, 2000년 64.6%로 급격히 상승하는 추세다.
지난 해에는 2000년 전체 신용카드 사용액(224조)보다도 많은 267조를 기록, 카드론을 제외한 전체 사용액의 60.4%를 차지했다.
만약 3개월~1년짜리 대출상품인 ‘카드론’취급액까지 합칠 경우 전체 카드사용액의 무려 71.6%에 달한다. 신용카드가 아니라 ‘대출증서’라는 표현마저 무색할 정도다.
소득이 없는 미성년자나 대학생 등에게 무차별적으로 발급된 카드가 돈을 빌려 쓰는 도구로 전락할 경우 그 폐해는 불 보듯 뻔하다.
금융권 관계자는 “신용도 낮아 사채시장에서도 돈을 빌리기가 쉽지 않은 사람들에게까지 카드발급이 이뤄지고 있는 게 현실”이라며 “만약 가계파산의 도미노사태가 현실화할 경우 출발점은 카드업계가 될 것”이라고 경고했다.
변형섭기자
hispeed@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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