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이력서] 이주일(5)군예대 시절ㆍ上

이전기사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기사가 저장 되었습니다.

기사저장이 취소 되었습니다.

[나의 이력서] 이주일(5)군예대 시절ㆍ上

입력
2002.03.22 00:00
0 0

요즘 민주당 국민참여 경선을 재미있게 보고 있다.광주에서 한화갑(韓和甲) 후보가 3위로 밀리고 노무현(盧武鉉) 후보가 1위를 차지한 것은 일종의 ‘바람’이다. 바람이 불고 있는 것이다.

정치에서는 이 바람을 무시 못한다. 바람이 강원도에서도 분다면 서울 본 대회 역시 예상할 수 없다.

오늘은 군대시절 이야기를 해야겠다. 내 연예인생이 군입대부터 시작됐고 결혼도 군에서 한 만큼 그 시절 이야기는 비교적 자세히 하겠다.

나는 1961년 10월 논산훈련소에 입소했는데 첫날부터 뭇매를 맞았다. 편한 보직을 받으려고 신흥대(현 경희대)를 나왔다고 거짓말을 했기 때문이었다.

신흥대 교수 이름을 들먹이며 꼬치꼬치 캐묻는 장교에게 내가 당할 수가 있나. 그 장교가 마침 신흥대 출신이었다.

논산훈련병 시절 나는 이미 이름을 날렸다. 당시 훈련소에서는 1년에 몇 차례 노래자랑대회를 열었는데 내가 이 대회에서 노래를 부르며 바보흉내를 내 대단한 박수를 받았다.

강원도 화천 최전방 사단에 배치를 받았다가 결국 군예대에 전속된 데는 이 훈련병 시절 영향이 컸다.

군위문단에서 우리 사단으로 위문공연을 왔을 때 동기들이 나를 대표선수로 지명한 것이다. 나는 모처럼 신이 났고 무대는 뒤집어졌다.

내가 하도 웃기니까 군예대 선임하사가 우리 중대장에게 부탁해 외출증을 끊어왔다. 당시 군예대는 부대가 아닌 인근 민가에 묵고 있었다.

선임하사는 내가 마음에 들었는지 전직이 뭐냐고 물었다. “쇼판에 좀 있었습니다.” 나는 또 거짓말을 했다. 그는 곧바로 정훈국에 청을 넣어 나를 군예대에 전속시켜 주었다.

그러나 이 거짓말도 금세 들통이 났고 이튿날부터 군예대 취사반으로 전락했다.

‘빳다’ 세례를 받은 것은 물론이다. 밥이 설었다고 터지고, 밥을 태웠다고 터지고…. 이렇게 고생하기를 1년이 흘렀을까.

전방으로 쫓겨나기 직전 내게 구세주가 나타났다. 당시 내 선임자로 군예대에서 극연출을 맡고 있던 임충헌(林忠憲ㆍ현 ㈜한국화장품 대표이사 회장)씨였다.

임씨는 얼굴에 눈물자국이 마르지 않던 내가 불쌍했는지 군예대에 “가르치면 가능성이 있는 배우”라고 나를 추천해줬다.

그리고는 서울로 휴가를 가면서 나를 대동해 서울시민회관에서 열린 고 서영춘(徐永春)씨의 리사이틀 공연을 보여줬다.

‘시골영감 처음 타는 기차놀이다, 차표 파는 아저씨와 승강이 하네…’ ‘인천 앞바다에 사이다가 떠도 곱뿌(컵)가 없으면…’ 같은 서씨의 주옥 같은 레퍼토리를 본 것은 이 때가 처음이었다.

다음날 부대로 돌아온 나는 임씨의 지도를 받아가며 서씨의 레퍼토리를 그대로 흉내내는 연습을 했다. 약 한 달 동안 피나는 연습을 했다.

마침내 화천에서 내 첫 무대가 이뤄졌다. 사단장 이하 전 대원이 화천군인극장에 모였는데 그야말로 난리가 났다. 그렇게 다시 1년이 지나자 우리 사단에서는 ‘정주일이 모르면 간첩’이라는 얘기까지 나왔다.

사단장은 나를 수시로 불러 술도 사주면서 남들이 시기할 정도로 나를 총애했다. 사단장이 주최하는 파티에 단골로 출연한 것도 이때다.

그런데 군대 말년 느닷없이 나타난 한 명의 ‘쫄따구’가 내 행복한 군예대 생활을 산산조각 내버렸다. 훗날 사단장의 총애까지 앗아간 ‘피리의 달인’ 이생강(李生剛)씨가 입대한 것이다.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기사가 저장 되었습니다.

기사저장이 취소 되었습니다.

한국일보가 직접 편집한 뉴스 네이버에서도 보실 수 있습니다. 뉴스스탠드에서 구독하기
세상을 보는 균형, 한국일보Copyright ⓒ Hankookilbo 신문 구독신청

live issue

댓글0

0 / 250

중복 선택 불가 안내

이미 공감 표현을 선택하신
기사입니다. 변경을 원하시면 취소
후 다시 선택해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