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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이력서] 이주일(4)불량학생 이주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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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이력서] 이주일(4)불량학생 이주일

입력
2002.03.21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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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의 학생이 아니었지.”나는 지금도 내 중ㆍ고등학생 시절을 묻는 사람에게는 이렇게 대답한다.

아버지의 좌익 테러와 이로 인한 집안의 몰락으로 중학생 때부터 동네 불량배들과 어울려 다녔다. 내가 동네 불량배였다.

1956년 강릉사범병설중 2학년 때의 일이다. 저돌적이고 조숙하고 제멋대로였던 나는 동네 뒷산에서 술 한 잔 한 다음 미인이 많기로 소문난 강릉여고 기숙사 담을 뛰어넘었다.

기숙사 경비원에게 들통이 난 것은 당연지사. 다행히 도망은 쳤지만 중학교 어깨들 사이에서 첨단으로 통하던 내 모자를 물증으로 남기고 말았다. 결국 나는 정학처분을 받았다.

이런 일도 있었다. 서숙원 선생님이라고 영어교사가 있었는데 서울에서 명문대를 나온 데다 얼굴도 예뻐 여자로서 사랑하게 됐다.

그래서 시험시간 영어답안지에 “서숙원 선생님을 사랑합니다”라고 썼는데 이게 화근이었다. 이 답안지를 엉뚱하게 훈육선생이 본 것이다. 나는 또 정학처분을 받았다.

아이들도 많이 팼다. 중2때부터 가세가 급격히 기울면서 맨 날 잘 사는 집 놈들은 무조건 팼다.

사랑고백 사건으로 정학처분을 받았을 때는 아예 무대를 학교 진입로쪽으로 옮겨 학교에 가는 아이들을 팼다.

국민학교 때만 해도 1등을 놓치지 않던 내가 집안 형편 때문에 불량학생이 돼 버린 것이다.

학교에서는 이런 나에게 결국 퇴학처분을 내렸다. 중3때 집안이 쫄딱 망해 춘천으로 이사를 온 후에도 이런 생활은 계속됐다.

춘천고 2학년 때 드디어 내 코를 주저앉게 한 사건이 일어났다.

친구들과 여학생 몇 명과 함께 경포대에 놀러 갔는데 텐트도 치고 신나게 노는 모습이 진관이라는 강릉 건달 놈 눈에 거슬렸나 보다.

깡패 20여 명을 데리고 와 여학생 텐트를 덮쳤는데 내 호기가 문제였다. “다 덤벼”라고 말한 순간 눈 앞에서 뭐가 번쩍거렸다. 보트를 젓는 노에 코 중앙을 정통으로 얻어 맞은 것이다.

이쯤에서 내 친구 박종환(朴鍾煥) 감독 이야기를 해야겠다.

나는 중학교 때부터 축구부에서 활동했는데 우직한 축구가 내 기질에 맞았던 모양이다. 그리고 춘천고 축구부에는 나보다 두 살 위인 박종환이 있었다.

박 감독과 하춘화(河春花), 고 정주영(鄭周永) 회장 이야기는 나중에 따로 시간을 내서 충분히 할 것이다.

2년 휴학을 했던 탓에 나와 동급생이었던 박종환은 지역 여고생들의 선망의 대상이었다. 당시 박종환은 풀백, 나는 라이트 윙이었는데 그는 한마디로 날쌘 표범이었다.

오죽했으면 고2때 청소년대표로 뽑혔겠는가. 더욱이 대표선수로 외국까지 갔다 왔으니 그의 인기는 정말 대단했다.

어쨌든 춘천고 졸업 무렵 박종환과 나, 그리고 다른 친구 3명은 당시 대한민국에서 축구가 제일 센 신흥대(지금의 경희대)에 원서를 냈다.

무난히 합격통지서를 손에 쥔 우리 다섯 사람은 입학하기도 전에 서울 이문동에 자취방을 정해놓고 합숙을 시작했는데, 이때 내 인생을 바꿔버린 또 하나의 사건이 생겼다.

박종환만 빼고 우리 네 명이 고향에서 부쳐온 입학금을 ‘섰다’판에서 모두 날려버린 것이다.

이 사건으로 나는 군에 자원 입대해야 했고, 박종환은 어엿한 대학생이 됐다. 그리고 이때부터 우리는 전혀 다른 길을 걸었다.

나는 군예대와 유랑극단을 거쳐 연예인으로, 박종환은 세계청소년선수권 4강 신화의 주인공으로서 변모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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