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0년대 어떤 선원이 스코틀랜드의 한 항구에서 짐을 내린 뒤 포르투갈의 리스본으로 되돌아 가는 포도주 운반선의 냉동창고 속에서 얼어죽었다.냉동실 벽에는 그 선원이 죽어가면서 뾰족한 쇠조각으로 새겨놓은 고통의 기록이 시간대 별로 적혀 있었다.
그는 짐을 다 내렸는지 확인하기 위해 냉동실에 들어갔다. 그 사이 아무도 없는 줄 알고 동료 선원이 밖에서 냉동실 문을 잠궈 버렸다. 문을 두드렸지만 아무도 오지 않았다.
냉동실 안에는 충분한 음식이 있었다. 그러나 선원은 자기가 오래 견디지 못할 것을 알고 있었다.
처음에는 냉기가 코와 손가락 발가락을 얼렸고, 시간이 가면서 언 부위는 넓어졌다. 그리고 이내 따끔거리는 상처로 바뀌어 갔다. 이윽고 온몸이 하나의 얼음덩이로 굳어져 가는 것을 느꼈다.
배가 리스본에 도착한 후, 선장은 냉동실 안에 죽어있는 선원을 발견하였다. 그리고 벽에 쓰여진 고통의 기록을 읽었다. 그러다가 선장은 놀라 기절할 뻔했다.
기록의 내용 때문이 아니라 컨테이너 속의 온도가 상당히 높다는 것을 느꼈기 때문이다.
선장은 실내 온도를 다시 측정하게 했다. 영상 19도였다. 리스본으로 돌아오는 배는 포도주를 적재하지 않았기 때문에 항해 도중 냉장고는 작동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런데 그 선원은 왜 얼어죽었을까?
선원은 몸이 점점 언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정말로 얼어 죽었다. 이것이 생각과 상상의 가공할 힘이다.
존재하지 않는 것을 존재하게 하고, 가상의 것이 현실이 되게 하고, 이루어 지지 않은 것을 이루어 진 것으로 만들어 낸다. 바로 인류가 역사를 만들어 온 힘이다.
지금은 정보와 지식의 시대라고 말한다. 그러나 유감스럽게 우리는 생각과 상상의 시대 속에 살고 있지는 못하는 것 같다.
혼자 있는 것을 견디지 못하고 늘 접속되기를 원한다. 홀로 생각하기보다는 무리 속에 섞여 잡담으로 하루를 소비한다.
정보의 하나씩을 외울 수는 있지만 단편적 인 정보를 연결하여 새로운 용도를 발견해내는 데에는 한없이 취약하다.
정보의 과잉은 때론 정신적인 정보의 검열에서 효과를 발휘한다. 옛날에는 정보를 차단함으로써 정보를 검열했으나 네트워크의 시대에는 정보를 차단할 수 없다.
그래서 정보 속에 또 다른 정보를 넣고 정보를 범람시킴으로써 진짜 정보에 접근하는 것을 막는다.
‘정보의 물타기’가 정보의 차단보다 훨씬 효과적인 검열이다. 과잉과 범람 속에서 살아남는 것은 대중 매체가 만들어낸 상품뿐이다.
인기가 있기 때문에 소비된다. 그리고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공유된다. 정보의 과잉 속에서 어찌할 줄 모르는 사이에 누군가가 골라 준 스탠더드를 따르게 된다.
스스로 선택할 수 없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을 따라갈 뿐이다. 그러므로 생각과 상상력이 없는 사람들에게는 개성은 없고 유행만 있게 된다.
이들은 심지어 ‘유행을 따르면 가장 개성적인 사람’이라는 엄청난 착각에 빠지게 된다.
무의미한 정보의 홍수 속에서 익사하지 않는 방법은 생각하고 상상하는 것이다.
생각한다는 것은 정보들을 걸러 의미있는 정보를 찾아낼 수 있다는 뜻이고, 상상한다는 것은 정보의 결합을 통해 새로운 정보를 만들어 낸다는 뜻이다. 이것이 바로 창의력이다.
창의력은 무에서 유를 만들어 내는 것이 아니다. 하늘 아래 새로운 것은 없다.
지금껏 연결되지 않는 것들을 서로 연결하여, 알고 있는 용도 외에 또 다른 용도를 찾아내는 것이 바로 창의력이다.
그러므로 생각하고 상상할 수 있는 사람만이 의미있는 정보를 활용하고 새 정보를 만들어 냄으로써 미래를 창조할 수 있는 것이다.
미래를 만들어 내는 것이야말로 미래에 대응하는 가장 훌륭한 방법이다.
구본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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