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생님, 소설을 꼭 그렇게 쓰셔야 됩니까?”마주앉아 설렁탕을 먹던 검사가 나직하게 말했다.
나는 천천히 눈길을 들어 상대방을 바라보았다. 마흔이 다 차지 않은 것 같은 젊은 검사의 어조 뿐만이 아니라 얼굴도 아까 신문을 할 때와는 퍽 다르게 풀려 있었다.
나는 그를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그저 웃음지으며 다시 숟가락을 뜨기 시작했다. 1999년 9월 어느날 검찰청에서 있었던 일이다.
그 젊은 검사가 조사 책상을 떠나 굳이 그렇게 물었던 것은 자기보다 훨씬 나이 많은 소설가를 죄인 취급해가며 조사하는 것이 미안하고 마음 편치 않다는 표현이기도 했고, 또 한 가지는 왜 이런 괴로움을 미리미리 피해 서지 않느냐는 딱해 함을 담고 있기도 했다.
젊은 검사가 알고 싶어 했던것
그 검사는 ‘태백산맥’을 고발한 사람들이 제시한 500여 가지의 혐의사항들을 120여 가지로 간추려 조사하면서 내가 ‘객관적 자료’를 댈 수 있을 것인지 회의하는 눈치였다.
그런데, 1994년 6월에 ‘아리랑’을 쓰다 말고 경찰청의 조사를 받았던 것처럼 나는 다시 ‘한강’을 쓰는 것을 며칠 중단하고 검찰이 요구하는 객관적 자료를 하나도 빠짐없이 갖추어 조사에 대응했다. 그러고 나서 그 검사와는 더 만나지 못했다.
이제 와서 그 검사의 말이 다시 떠오르는 것은 그 물음이 ‘당신은 왜 문학을 하는가’ 하는 다른 표현이기 때문이고, 그때 내가 침묵을 했던 것은 가장 현명한 응답을 한 것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드는 탓이다.
고발당한 소설 ‘태백산맥’에 대해 어떤 편안한 휴게실이 아닌 검사실에서 그 진실을 전달한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일인 것이다.
6ㆍ25 시절을 전혀 알 수 없다고 실토한 젊은 검사가 나한테서 알고 싶어 했던 바, ‘당신은 왜 꼭 그렇게 쓰는가’ 하는 의문의 답은 저 멀리 40여 년 전에 그 뿌리가 닿아 있다.
문학에 사나이 한평생을 걸기로 작정하고 국문과 대학생이 되었을 때 가장 심각하고 절실했던 문제는 무엇이었던가.
무엇을 써야 할 것인가….
그것은 답을 얻기 어려운 물음이 아니었던가 한다. 나만 그랬던 것이 아니라 문학의 열정에 사로잡혀 있었던 내 주변의 문학청년들 모두가 그 물음에 시달리고 있었다.
그것은 바로 ‘문학을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로 이어지는 가장 기본적이고 본질적인 고민이었고, 그것은 또 ‘왜 문학을 하는가’ 하는 궁극적인 문제로 직통하는 시발점이었다.
나는 대학생이 되기 전에 벌써 확고부동한 가치 한 가지를 의식 깊이 세워두고 있었다.
만인 평등의 민주주의에 대한 절대 신뢰, 그에 따른 봉건주의 유습의 철저한 배격-이 둘이면서 하나인 가치관은, 줄기세포가 수많은 종류의 기관을 만들어가는 세포로 변형되고 분화하듯이 복합적 작가의식을 형성해 나아가는 모태가 되었다.
흑인노예 만화보고 슬픈 통증
나는 어렸을 때부터 비정상일 만큼 이상한 데가 있었다.
6ㆍ25 전쟁이 끝난 직후 그 책 귀하던 시절에 만화 한 권을 빌려보게 되었다. 초등학교 4학년 무렵이었던 그때 나는 사랑방의 옛날이야기에 정신을 팔고, 만화 보는 데 두 눈에 쌍불을 켜고 있었다.
그 만화는 미국 흑인 노예의 슬프고 슬픈 이야기였다. 백인들에게 쫓기며 아이를 안고 얼음장 위에서 넓은 강을 떠내려가는 흑인 여자….
나는 그 여자로 변했고 책을 덮고, 날이 가도 그 슬픈 통증은 전혀 가시지 않고 가슴 속에 생생히 살아 있었다.
그리고 중학생이 되어 노예 해방과 민주주의를 알게 되었다. 너무 자연스럽게 링컨을 존경하는 인물로 삼게 되었고, 민주주의에 역행하는 궤도가 봉건주의임을 식별하게 되었다.
그 식별에 따라 우리 사회에 일어난 여러 문제점들이 봉건제도에서 비롯된 것임을 조금씩 눈떠가게 되었고, 고학년의 역사를 배워가면서 봉건주의의 비인간성은 점점 더 크게 보이게 되었다.
내가 고등학교 2학년 때, 아버지는 장남과 차남인 나를 불러 앉히고 족보 찾는 법을 가르치려고 했다.
“아버지, 지금 세상이 어떤 세상인데…” 하며 나는 즉각 반발했고, 아버지는 버르장머리없는 차남에게 손찌검을 했다.
부모한테 맞을 때는 빨리 달아나는 것이 효도라는 말이 있다.
나는 효도하느라고 잽싸게 도망쳤고, 예순이 된 지금까지도 족보 찾을 줄을 모른다. 그러나 나는 그 무식을 부끄러워하지 않는다. 그 뿐만이 아니다.
13, 4년 전에는 ‘문중을 빛낸 어른’이라며 화수회에 가입하라고 사람을 보내왔다. 나는 심부름 온 여직원에게 이 나라에 번창하고 있는 모든 화수회가 왜 없어져야 하는지를 교육시킨 다음 그 여직원을 돌려보냈다.
나는 한번 옳다고 마음에 심은 가치는 이렇듯 미련하게 지키고 가꾸려고 애써 왔다.
대학교 2학년 때였던가. ‘스파르타쿠스’라는 영화를 보게 되었다. 수많은 노예들이 엄청나게 큰 바위덩이들을 끌고 밀며 거대한 임금의 무덤을 만들고 있었다.
그들 중에 한 여자는 이미 고정된 바위와 새로 붙이는 바위 사이에서 흙이며 티끌을 쓸어내는 일을 하고 있었다.
그런데, 어느 순간 밀려드는 바위 틈에 옷자락이 끼어 그 여자는 바위 사이를 빠져 나오려고 몸부림치다가 끝내 두 바위가 밀착되는 속에서 흔적도 없이 으깨져 죽고 말았다.
옛날에 만화를 보고 그랬던 것처럼 나는 다시금 바위 사이에서 으깨져 죽은 그 여자로 변해 새로운 가슴의 통증을 앓게 되었다.
이처럼 소설에서고 현실에서도 가엾고 불쌍하고 억울하게 당하는 힘 없고 가난한 사람들의 이야기는 전혀 간격이 없이 내 가슴의 정면으로 부딪쳐 왔고, 나는 곧바로 그들이 되면서 통증을 앓아야 했다.
그 대책없는 가슴에 대해 최근에 이르러서야 ‘작가적 가슴’이라고 이름붙여 주었다.
그런 가슴을 안고 대학생 상급반으로 올라가고 있는 나는 우리 사회와 역사를 통찰하려고 애쓰면서 ‘어떻게 쓸까’ 보다는 ‘무엇을 쓸까’를 고심하는 문청이 되어 있었다.
그 시절에 내 의식을 무장시켜 나가고 있는 것은 앞서 살다간 사람들이 남긴 경구들이었다.
작가가 돈에 작품을 파는 것은 창녀가 몸을 파는 것보다 더 더러운 짓이다.
작가는 모든 비인간적인 것에 저항해야 하고, 그 실천이 위대한 작품을 탄생시킨다. 톨스토이와 빅토르 위고의 그런 말들은 내 영혼을 흔든 대표적인 것들이다.
나는 그런 경구들처럼 내 의식과 영혼을 성장시키고 지키려고 애쓰는 한편으로, 우리의 험난하고 가혹한 역사에 대해서, 그런 역사의 땅에 태어났음에 대해서, 그리고 하필이면 문학을 하려고 하는 것에 대해서, 그렇다면 무엇을 쓸 것인가에 대해서 고심고심하면서 대학을 졸업했다.
인간다운 세상위해 기여하고파
군대를 거쳐 사회인이 되었을 때 ‘우리’를 바라보는 사회의식은 더욱 견고해져 있었고, 마음에 심은 가치들은 한결 더 많아져 생울타리를 이루고 있었다.
작가가 되는 두 편의 작품인 ‘누명’이 반미 냄새가 진하고, ‘선생님 기행’이 사회 부조리를 드러내고 있는 것은 숨길 수 없는 나의 모습이었다.
역사의식적인 면과 사회의식적인 면, 그 두 갈레 길을 심화ㆍ확대시키려고 노력해온 것이 내 작가의 생애가 아닌가 한다.
만인의 평등이 인간 사회의 지고한 가치라고 믿듯이 문학 또한 그런 아름다운 세상을 실현하기 위해서, 인간의 인간다운 삶을 위해서 인간에게 기여해야 한다는 것을 최고 가치로 삼고 오늘에 이르렀다.
무릎 꿇지 않고 굽히지 않는 그 길을 걷다 보니 이념 공세도 당하게 되고, 계급주의자 굴레도 쓰게 되고, 사상불온자로 고발도 당하게 되었다. 그런 고통은 분단시대를 사는 작가로 피할 수 없는 것이고, 민족이 당하는 고통에 비하면 지극히 미약한 것이다.
그 검사한테는 미안한 일이지만 앞으로 필요하다면 ‘태백산맥’보다 더한 작품도 쓰기를 망설이지 않은 것이다.
어차피 작가는 진실을 말하지 않으면 안되는 존재이며, 진실한 작가는 그 어느 시대 그 어떤 정권하고든 불화하게 되어 있다. 왜냐하면 모든 정권이나 체제는 오류를 남기게 마련이기 때문이다.
인간의 인간다운 세상을 위해 인간에게 기여할 수 있다면 그보다 더 숭고하고 보람스러운 일이 어디 또 있을까.
진정한 문학, 참된 문학은 역사를 변혁시키고 사회를 변화시킬 수 있다고 믿고 있다. 그 길을 따라 남은 생애를 살고자 한다. 적지 않은 사람들이 나에게 물어왔다. 당신은 사상적으로 성분적으로 무슨 주의자냐고.
굳이 그렇게 분류하고 싶다면, 정의와 진실을 실현시키고자 하니까 진보주의자고, 민족적 자존을 지키고자 하니까 민족주의자라고, 그 어떤 간섭이나 억압 없이 예술 창작을 하고자 하니까 자유주의자이다.
그러나 이런 분류들이 얼마나 부질없는 일인가. 나는 경건한 마음으로 문학을 섬기며 남은 생애를 흠없이 살기를 바라고 있을 뿐이다.
그러므로 이 서러운 역사의 땅에서 진실을 찾아 헤매며 글을 쓰다가 갈 예술가일 뿐이다.
조정래
■ 연보
▲ 1943년 전남 승주 선암사 출생
▲ 1966년 동국대 국문과 졸업
▲ 1970년 ‘현대문학’에 단편 ‘누명’이 추천돼 등단
▲ 창작집 ‘어떤 전설’ ‘20년을 비가 내리는 땅’ ‘황토’ ‘한, 그 그늘의 자리’ ‘유형의 땅’ 장편소설 ‘대장경’ ‘불놀이’ ‘태백산맥’ ‘아리랑’ ‘한강’ 등
▲ 현대문학상(1981) 대한민국문학상(1982) 단재문학상(1991) 노신문학상(1998) 등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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