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물을 흘리지 못하는 사람에게는 참 민망한 영화가 ‘존 큐(Jhon Qㆍ닉 카사베츠 감독)’다.남들은 펑펑 울고 있는데, 멀뚱멀뚱 앉아 있자니 메마른 사람처럼 보이고, 그렇다고 억지 눈물을 짜낼 수도 없고…
이성적 판단 때문에 눈물을 흘릴 수 없었다고 말할 수 있는 자기 합리화의 근거 몇 가지.
하나, 존 큐는 과녁을 잘못 맞추었다. 우리 교포들이 이민을 가서도 외국인이 아니라 같은 교포들에게 사기치는 이유는.
백인사회에는 접근이 어렵고, 흑인에게는 자신이 가진 것조차 빼앗길까 두렵고. 그래서 말 잘 통하고 만만한 이들을 잡을 수밖에 없다.
존 큐 역시 같은 처지다. 저소득 흑인인 그가 찾은 곳은 동네의 종합병원이고, 역시 그곳에는 고만고만한 계급이 몰려있다.
그가 인질로 잡은 이들은 영어를 잘 못하는 남미계 어머니, 남루해 보이는 흑인과 백인 커플, 남자에게 얻어 맞고도 찍소리도 하지 못하는 백인여자. 존 큐의 고통은 궁극적으로 자신의 노동 시간을 갉아먹은 남미 노동자가 아니라 보험료를 내고도 혜택을 받지 못하게 만든 국가 시스템의 문제에서 발생한 것인데도 말이다.
둘, 아들을 구한 것은 엄밀히 말해 존 큐의 용기가 아니라 부르주아의 눈물이었다.
생중계되는 존 큐의 애절한 인질극을 보던 원무과 책임자(앤 헤이쉬)의 눈에서 주르륵 흘러 내린 눈물, 이것이 없었다면 아이는 수술 명단에 오르지도 못했다.
셋, 고작 2년형을 받은 존 큐를 두고 ‘억울하다’고 영화가 강변하는 것은 ‘오버’다. 존 큐는 한나절 인질극으로 3억원이 드는 수술을 공짜로 했다.
그가 받은 ‘특혜’를 생각하면 2년은 결코 길지 않다. 그리고 실탄이 없었다 해도 총을 들고 응급실에 쳐들어가 인질극을 벌인 것은 분명 범죄다.
넷, 왜 꼭 ‘아버지- 아들’ 구도만 있을까. ‘존 큐’의 덴젤 워싱턴에 앞서 멜 깁슨은 ‘랜섬’에서 유괴당한 외아들을 위해 총을 들었고, 로베르토 베니니 역시 ‘인생은 아름다워’에서 외아들을 위해 슬프고 아름다운 거짓말을 꾸며댔다.
아버지에게 아들이란 자기 DNA의 기억이자 미래이기 때문일까? 아버지도 아니고, 아들도 없어 모르겠다. 컷!
박은주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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