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내 마음속 숨은 아이야, 나오너라"‘이른 새벽 석굴암을 오르는 영희의 맑은 눈에 해가 솟읍니다. 붉고 둥근 동해의 해가 영희의 눈 속에서 솟아 오릅니다…’
‘석굴암을 오르는 영희’라는 제목의 동시를 응모했을 때 정호승(52)씨는 군 복무 중이었다.
1972년 한국일보 신춘문예 당선작이었다.
그는 “모든 사람의 눈에서 눈물을 닦아주고 싶다는 마하트마 간디 옹의 고귀한 말씀을 평생 기억하겠다”고 당선 소감에서 말했다.
스물두 살의 문학청년이 문단에 첫발을 내디뎠던 순간이다.
정호승 시인이 동시집 ‘풀잎에도 상처가 있다’(열림원 발행)를 펴냈다. 시집 출간에 즈음해 만난 자리에서 시인은 “별 걸 다 한다는 소리를 들을지도 모르겠다”면서 웃는다.
‘별 것’일까. 동시로 등단한 뒤 이듬해 대한일보 신춘문예 시 부문에 당선됐다.
그는 그때부터 ‘어른을 위한 시’만 썼고 일곱 권의 시집을 묶었다. 이번 여덟 번째 시집에서 정씨는 고백한다.
“이제 동심을 잃지 않고 살고 싶습니다.” 시인은 비로소 자신의 가슴 깊이 숨어있던 어린이를 불러냈다. 30년 만에 등단의 처음 자리로 돌아온 것이다.
시집에 ‘어른이 읽는 동시’라는 부제를 달았다. “처음에는 ‘어른을 위한 동시’로 할까 했다. 그러나 부담스러웠다.
대신 어른이 읽는 동시라고 생각해 봤더니 시가 편안하게 쓰여지더라.” 그는 사랑과 그리움과 외로움을 노래하는 것이 힘겨웠다고 했다.
며칠을 앓으면서 시를 쏟은 뒤 한참을 침묵한다.
어른을 위한 시를 쓰면서 마음에 상처가 쌓여갔던 시인은, 동심이 서러움의 눈물을 녹인다는 것을 알게 됐다.
그때부터 동시를 썼다. 글 쓰는 것이 더 이상 아픔이 되지 않았다. 너무 기뻤다.
4년 동안 차곡차곡 써놓은 84편의 동시는 사랑스럽기도 하고 짓궂기도 하다. 정씨는 슬픈 것을 보고 금세 울먹이고, 즐거운 것을 보면 방실방실 웃는다.
마음에 안 들면 떼를 쓰고, 개구쟁이처럼 말장난을 한다. 그는 무엇보다 아이처럼 예쁜 눈으로 세상을 보려고 애쓴다.
‘아버지가 내게 말씀하셨다/ 참사람이 되어야 한다고// 나는 새한테 말했다/ 참새가 되어야 한다고’(‘참새’)
‘부엌에 있던 엄마가 급히 대문을 열고 나가/ 고등어 한 마리를 산다/ 나는 내 방 창문을 열고/ 고개를 내밀고/ 고등어장사 아저씨한테 말했다/ 아저씨 아저씨/ 고등어 얼굴 예쁜 걸로 주세요’(‘얼굴’ 부분)
그러나 반백이 넘어버린 시인은 더 이상 아이의 마음을 꼭같이 가질 수는 없다는 것을 안다. 그래서 그가 쓴 동시는 때로 아이의 키를 넘어 어른의 가슴을 따끔거리게 한다.
‘비오는 날에는/ 빗방울에도 상처가 있습니다// 눈오는 날에는/ 눈송이에도 상처가 있습니다// 눈비 그치면/ 햇살에도 상처가 있습니다’(‘상처’)
정씨는 인터뷰 내내 환하게 웃었다. 좀처럼 말이 없던 시인은 이제 하고 싶은 얘기를 도란도란 전한다. 그는 앞으로도 열심히 동시를 쓸 것이라고 했다, 막 말하는 즐거움을 알게 된 사람처럼.
김지영기자
kimjy@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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