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아침 출근길에 그 사람이 보이지 않더구나.떼밀리듯 지하철 개찰구를 빠져나와, 광화문이 보이는 계단참을 나오고 나서도 “내가 뭘 놓쳤지…” 하는 생각이 한동안 뒷머리를 붙잡더라구.
그제서야 그 양반이 안 보인다는 것을 알았어. 요 며칠 새 계단에 서 있던 그 남자였지.
‘집에서 만든 김밥’이라고 써 붙인 박스를 앞에 놓고, 내가 아직 졸린 발걸음으로 서너 계단을 오를 때마다 “집에서 만든 김밥입니다”라고 외치던 그 양반.
얼굴도 말쑥하고, 나이는 우리와 엇비슷할까? 그 남자가 안 보이는거야. 왜 그의 빈 자리에 네 모습이 오버랩됐던 걸까. 내가 뭘 놓쳤던 걸까.
그래서 편지를 쓴다.
네놈한테 편지 쓰는 게, 아마 20년도 더 됐지 싶다. 우리 갓 대학 들어갔을 때, 어디랄 것 없이 스산했던 캠퍼스에서 끄적댔던 편지 이후 처음 아니냐.
시국이 그렇게 삭막했어도 가끔 종로서 만나 소주 한 잔 들이켜고, 담배 떨어지면 꽁초 되말아 피워도 황동규 시구처럼 ‘아직 젊군, 다색(多色)의 새벽 하늘’ 아니었어?
이제 우리 더 이상 그때처럼 젊지 않아. 광화문역 그 남자처럼 말이야. 지금이 3월이니 꼭 4년 전이구나. 밤 12시가 넘어 너 전화 했었지. “임마, 나 잘렸어.”
대한민국에서는 최고라는 대기업에서, 중근동 지역 수출을 책임진 팀장이라던 네가, IMF 닥친 지 넉달여만에 잘렸다는 거야. 안 믿기더군.
그 후 4년이다. 네가 무슨 벌이로 어떻게 살고 있는지, 나 못 물어 보겠더라. 물론 우리 곗군들이야 한두 달에 한번은 만났지.
그 사이 대기업 명퇴하고 오징어쌈밥집 차린 친구도 있고, 너랑 같은 회사 있다가 다른 기업체에 취직해 더 잘 풀렸다는 친구도 있고 아, 우리 동기 중에서는 대한민국에서 제일 관객 많이 든 영화 만든 친구도 나왔지.
그렇지만 모두들 네 생활이나 근황에 대해서만은 함부로 말을 꺼내지 못했어. 너 술 들이켜면 적당히 취기 오르는 모습이야 여전했지만.
들리는 소문과 짐작으로는 너 신도시 전셋집에서 꼼짝하지 않는 모양이더구나. 인터넷 들여다보며, 갖고 있던 우리사주로 주식투자 하겠거니 하는 이야기도 있더라.
그래 요즘 주식 많이 오르더군. 지수 1,000 돌파 운운 하는 전망도 있데. 그러나 그게 우리 같은 치하고 무슨 상관이겠니?
그래도 제수씨 잘 참아 여덟 살, 일곱 살 난 연년생 두 아들 말썽없이 키우는 있는 것만 해도 얼마나 큰 복이냐.
처갓집에서는 너 실직한 거 아직도 모르고 있다면서.
IMF 졸업했고, 실업률도 98년 6.8%에서 99년 6.3%, 2000년 4.1%, 지난해는 3.7%로 낮아졌다지만 나는 네놈 생각하면 그런 통계 눈에도 안 들어온다.
어머니는 건강하시지?
전쟁 때 당한 부상으로 아버지 고생하시다 세상 버린 뒤, 장남인 너하고 밑으로 세 여동생 훌륭하게 키워내신 어머니. 어머니는 너 실직한 거 알고나 계시는지 모르겠다.
아버지는 전쟁, 아들은 IMF…. 그러나 지난 세월 4년이지만, 우리 앞으로 40년이다.
살아온 만큼 더 살아야 할 날들이 남아있다. 힘 내자. 방을 나와야 한다.
다시 세상으로 뛰어들어야 한다. 천근보다 더한 우리 어깨의 짐 짊어지고 먼 길 가야 한다.
내 다시 광화문역 그 양반 마주치면 그이가 만든 김밥으로 오랜만에 아침 때울란다. 그리고 너에게 전화 하마.
하종오 문화부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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