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앙은행은 불,수레바퀴와 함께 인류역사의 3대 발명품으로 꼽힌다.통화가치 안정을 통해 인플레와 싸워나가는 중앙은행은 각종 국내외 경제적 위협과 정치적 유혹으로부터 국민경제의 건전성을 지켜주는 최종 수호자나 다름없다.선진국치고 중앙은행이 허약한 나라는 없고,중앙은행이 허약한 나라치고 선진국이 된 예가 없는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박승 한국은행 총재 내정을 계기로 우리나라 중앙은행과 총재 위상의 변천사를 접중 점검해본다./편집자주≫한국은행 50년사는 질곡과 굴욕의 역사다.
인플레와의 투쟁이 중앙은행의 존재이유임에도 불구, 개발연대의 고도성장 지상주의는 한은을 한낱 ‘성장통화의 공급처’로 전락시켰다.
인플레를 희생해서라도 성장률을 끌어올리고자 했던 그 시대에 한은에는 ‘통화당국’ 보다는 ‘발권당국’의 역할만이 요구됐던 것이다.
한은의 지위도 철저히 정부 예속적이었다. 독립성이나 중립성에 대한 요구는 ‘반정부적’인 것으로까지 여겨지기도 했다.
1998년 한은법 개정 이전까지 한은 독립은 법적으로 불가능했다.
구 한은법은 통화신용정책의 최고 의사결정기구인 금융통화운영위원회(현 금융통화위원회) 의장을 재무부장관이 맡도록 규정했다.
통화량 조절이나 금리 결정은 물론 내부인사까지도 금통위 의장인 재무부장관 승인사항이었다.
80년대이후 한은독립 요구가 거세지면서 재무부장관은 금통위에 불참하는게 관례였고, 한은 총재가 대부분 의사봉을 쥐었지만, 그래도 재무부는 ‘합법적’으로 한은을 장악했다.
한은은 ‘재무부의 남대문 출장소’란 말도 여기서 비롯됐다. 한은 총재 역시 ‘재무부 남대문 출장소장’에 불과했다.
한은내에선 “총재의 힘이 재무부 이재국 사무관보다도 못하다”는 푸념까지 나오기도 했다.
중앙은행의 독립성을 평가하는 중요한 잣대중 하나는 바로 총재의 임기보장이다.
그러나 총 21명의 역대 한은 총재 가운데 4년 임기를 채운 사람은 2대 김유택(金裕澤), 9대 김세련(金世鍊), 11대 김성환(金聖煥), 17대 김건(金建) 총재 및 21대인 현 전철환(全哲煥) 총재 등 5명 뿐이었다.
임기 절반인 2년을 넘기지 못한 총재도 9명이나 된다.
12대 신병현(申秉鉉) 총재는 재임중 상공부장관으로, 13대 김준성(金埈成) 총재는 부총리 겸 경제기획원장관으로, 15대 최창락(崔昌洛) 총재는 동력자원부 장관으로 자리를 옮겼다는 사실은 한은 총재의 임면이 통상 개각 차원에서 결정됐음을 말해준다.
한은 총재의 독립적 지위가 정치적 외풍에 의해 가장 무참히 파괴된 예는 18대 조순(趙淳) 총재다.
6공말이던 92년 18대 한은총재로 임명된 조 총재는 대선 당시 정주영(鄭周永) 국민당 후보가 “한은이 3,000억원의 돈을 찍어 민자당 김영삼(金泳三) 후보를 지원했다”고 주장한 것과 관련, 정 후보를 즉각 허위사실 유포혐의로 고소했다.
그러나 선거후 조 총재는 당선자인 YS측과 사전 협의없이 고소를 취하했고, 새 출범 직후 전격 경질됐다.
청와대측은 “조 총재가 사의를 표시해서 수리한 것일 뿐”이라고 밝혔지만, 사실은 ‘괘씸죄’에 의한 경질이란게 정설이다.
사실 조 총재는 경제부총리 시절 이뤄진 3당 합당 자체에 부정적이었고, 선거과정에선 민자당이 요구해온 재할인금리 인하압력을 거부해 YS캠프와 마찰을 빚기도 했다.
선거후에도 조 총재는 안정화론을 견지, 문민정부 초대 박재윤(朴在潤) 경제수석이 주도하던 고단위 단기부양책(신경제 100일계획)과 노선대립을 드러냈다.
특히 새 정부 출범후 ‘정주영 손봐주기’를 계획하던 YS측으로선 조 총재가 아무런 사전논의없이 정주영씨에 대한 소송까지 취하하자, 가차없이 그의 옷을 벗겼던 것이다.
하지만 한은 총재의 ‘단명’ 원인을 반드시 독립성 부재나 정치권력의 간섭 탓으로만 돌리기는 어렵다. 19대 김명호(金明浩) 총재의 경우 발권당국 보안체계에 구멍이 뚫린 부산지점 지폐유출사고로 중도하차했고, 20대 이경식(李經植) 총재는 환란
의 책임을 지고 물러나야 했다. 특히 이경식 총재는 은행감독원을 한은으로부터 분리하는 정부안에 동의했다는 ‘죄’로, 노조에 의해 역대 총재 게시판에 한동안 사진조차 걸리지 못하는 수모를 당해야 했다.
현 전철환 총재는 한은 총재가 금통위 의장을 맡은, 중앙은행 중립성이 법적으로 보장된 ‘독립 1호 총재’다.
취임초 정부 및 국회와 관계에서 너무 몸을 낮춘다는 지적도 있었고, 일부 금리정책이 경기변화에 ‘뒷북치기’식으로 흘렀다는 비판도 있었지만, 대과없이 환란을 수습하며 4년 임기를 마쳤다는게 일반적 평가다.
중앙은행의 독립성을 저해하는 정부당국자의 돌출발언이 없어진 것은 아니지만, 정부도 중앙은행의 고유영역을 가급적 존중하려는 분위기다.
한은 고위관계자는 “중앙은행 독립은 거스를 수 없는 흐름이다. 이젠 한은 스스로 정책을 통해 독립성을 검증받고, 방만한 내부요소를 제거하는 노력만 남아있다”고 말했다.
●역대 한은총재
1대 구용서 1950.6.5~51.12.18
2대 김유택 51.12.18~56.12.12
3대 김진형 56.12.12`60.5.21
4대 배의환 60.6.1~60.9.8
5대 전예용 60.9.8~61.5.30
6대 유창순 61.5.30~62.5.26
7대 민병도 62.5.26~63.12.26
9대 김세련 63.12.26~67.12.26
10대 서진수 67.12.26~70.5.2
11대 김성환 70.5.2~78.5.1
12대 신병현 78.5.2~80.7.5
13대 김준성 70.7.5~82.1.4
14대 하영기 82.1.5`83.10.31
15대 최창락 83.10.31~86.1.7
16대 박성상 86.1.13~88.3.25
17대 김건 88.3.26~92.3.25
18대 조순 92.3.26~93.3.14
19대 김명호 93.3.15~95.8.23
20대 이경식 95.8.24`98.3.5
21대 전철환 98.3.6~2002.3.31
이성철기자
sclee@hk.co.kr
■韓銀총재는 어떤 자리
한은 총재는 한마디로 ‘한국의 통화신용정책의 사령탑’이다.
1998년 한은법 개정 이전에는 재경원 장관이 금융통화위원회 의장을 맡고 총재는 금통위원 중 한 명에 불과했으나 법 개정 후 총재가 의장을 맡아 정책 입안부터 결정까지 막강한 권한을 행사하게 됐다.
특히 예전에는 한은 집행 간부 임명을 금통위에서 했으나 지금은 총재가 전권을 행사하고 있다.
그러나 한은법 개정 이후 총재의 권한이 강화된 것만은 아니다. 예전에는 금통위가 한은 예산을 결정했으나 지금은 재경부 장관의 승인을 받아야 한다.
또 은행감독기능 대부분이 금융감독원으로 넘어가면서 금융기관에 대한 정보의 접근 면에서 제약이 커졌다.
얼마전 한 이코노미스트는 한은 총재에게 경제대통령 역할을 맡기자고 공개적으로 주장한 일이 있다. 임기는 물론 인사권, 예산권도 보장하고 통화정책뿐 아니라 금융위기의 관리자역까지 부여하자는 것이었다.
그러나 현재 한은 총재는 4년 임기를 채우기도 쉽지 않고, 인사권은 있으나 예산의 독립성이 없어 경제 대통령이 되기에는 요원한 위치에 있다.
남대희기자
dhnam@hk.co.kr
■美 FRB등 외국 중앙은행장의 위상
미국에선 중앙은행을 ‘파티의 흥을 깨는 사람(party pooper)’이라고 부른다.
경기가 좀 좋아진다 싶으면, 연방준비제도이사회(FRB)는 인플레부터 걱정하면서 호황에 찬물을 끼얹는 발언이나 정책을 내놓기 때문이다.
가급적 경기를 띄우고 싶은 행정부로선 이런 FRB가 늘 ‘얄미운 시어머니(old lady)’같은 존재이기도 하다.
하지만 대통령 조차 FRB의 정책에 대해선 이의를 제기하지 않는다. FRB의 금리결정후엔 언제나 ‘FRB의 결정을 존중한다’는 짧막한 논평만 있을 뿐이다.
당장의 정치적 이해관계와는 어긋나더라도 FRB의 독립성을 존중하는 것이 국민경제의 건전한 발전에 이롭다는 것을 오랜 자본주의 역사를 거치면서 체득했기 때문이다.
세계 중앙은행의 ‘교과서’로 불리우는 FRB도 1913년 설립 당시엔 재무부 외곽기구정도에 불과했다. 그러나 대공황을 거치고 35년 새로운 법률이 제정되면서 FRB는 법적, 실질적 독립을 확보하게 됐다.
지난 67년간 FRB의장은 모두 7명이다. 52년간 22명째 총재를 맞는 한국은행과는 너무 대조적이다.
FRB의장 임기는 4년이지만, 사실상의 초대인 에클스 의장은 14년을 재임했고, 3대 마틴 의장은 무려 20년을 역임했다.
‘세계의 경제대통령’으로 불리우는 현 그린스펀 의장도 87년 이래 15년째 재임중이다. 특히 그린스펀 의장은 공화당원임에도 불구, 민주당의 클린턴 행정부 8년 동안 연임을 거듭했다.
경제가 잘 굴러가고, 시장이 신뢰하는 한 FRB의장의 당적은 문제될 것이 없고 그 독립성은 반드시 보장해준다는 미국의 인사관행과 중앙은행을 보는 행정부의 인식을 단적으로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전임 볼커 FRB의장은 80년대초 사상 최악의 불황속에서도 경제의 거품제거를 위해 금리를 두자릿수로 인상했고, 레이건 행정부는 이를 방해하지 않았다.
FRB의 독립성이 독단적 정책수행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FRB와 재무부간에는 통화ㆍ금리정책에 관한 정례협의채널이 상시 가동되고 있으며, 시장에 대한 모니터도 정밀하게 이뤄지고 있다.
일본의 중앙은행인 일본은행은 98년 법개정이후 독립성이 대폭 신장됐다.
최근 경기부양방안을 놓고 고이즈미 행정부와 일본은행이 마찰을 빚는 것은 중앙은행의 위상신장을 역설적으로 말해주는 대목이다.
과거엔 총재를 대장성 출신과 일본은행 출신이 번갈아 맡는 것이 관례(현 하야미 총재는 일본은행 출신)였지만, 앞으로도 이런 관행이 지속될지 여부는 미지수다.
이성철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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