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탈북자 이대로는 안된다 / 탈북 14년만에 한국국적 취득 김용화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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탈북자 이대로는 안된다 / 탈북 14년만에 한국국적 취득 김용화씨

입력
2002.03.20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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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일 탈북자 25명의 한국행은 자유를 향한 필사의 탈출극이자 대규모 탈북 행렬의 예고편이다.탈북자 문제를 더 이상 방치해서는 안된다는 국민적 각성이 싹트면서 전면적 정책 재검토를 요구하는 목소리도 커지고 있다.외교 틈바구니에서 14년간이나 무국적자로 떠돌아야 했던 김용화(48)씨와 같은 예를 또 다시 빚어야 할까./편집자주≫“내 땅에서 내 땅으로 오는 길이 왜 이리도 멀고 고단한가요.”

1988년 북한을 탈출, 수 차례 한국 정부에 망명을 신청했으나 정부가 ‘북한 주민임을 입증할 수 없다’며 탈북자 지위를 인정하지 않아 십 수년간 밀입국과 수감생활, 또다시 밀항을 되풀이 해야 했던 김용화(金龍華ㆍ48)씨.

그가 드디어 한국국적을 얻게 됐다.

중국 정부가 지난 달 ‘김씨는 중국국적자가 아닌 북한 주민’이라고 통보해 옴에 따라 정부도 19일 그를 탈북자로 인정하기로 확정해 조만간 주민등록증을 받게 된 것.

0.5톤 쪽배에 몸을 싣고 바다를 건널 만큼 튼튼했던 그의 몸은 오랜 떠돌이 생활과 수감 생활로 노인처럼 쇠잔해져 있었다.

“제가 중국인이면 왜 목숨 걸고 이 나라에 들어오려 했겠습니까? 제가 조선 사람인 것을 왜 중국 정부가 인정해 줘야 하는 겁니까?”

김씨의 말투에는 ‘한국국민이 됐다’는 기쁨보다는 그 긴 세월 동안 제 핏줄 하나도 제대로 보듬지 않은 조국에 대한 원망이 가득 배어 있었다.

김씨가 북한을 탈출한 것은 88년 7월. 평남 순안군 오금리에서 태어나 함흥철도국 승무지도원으로 일하던 김씨는 열차사고에 따른 문책을 피해 부인과 세 명의 자식을 남긴 채 중국으로 탈출했다.

그대로 북에 남아 있으면 ‘온 가족이 총살감’이었기 때문에 탈북에 성공해 ‘행방불명’ 처리되면 가족들이 목숨이라도 건질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에서 였다.

김씨는 주중 한국대사관에 망명을 요청했지만 우리 정부는 그를 받아주지 않았다. “중국과 불필요한 외교적 마찰은 피하고 싶다”는 이유였다.

이후 랴오닝, 지린, 산둥성 등 중국 각지를 떠돈 끝에 95년 2월 베트남으로 건너가 또 한 번 망명신청을 했으나 한국정부는 또 다시 그를 외면했다.

‘내 발로 남한에 들어가겠다’고 마음 먹은 김씨는 같은 해 6월 중국 서쪽 해안에서 작은 배에 몸을 싣고 밀입국을 시도, 한국땅에 발을 딛었다.

그러나 이번에는 정부가 중국 도피생활 중 돈을 주고 만든 위조 공민증을 문제 삼았다. 탈북자의 존재를 인정하고 싶지 않은 탓이었다.

무려 22차례에 걸친 재판에서 수 많은 탈북자와 실향민들이 그가 북한 출신임을 증언했으며 인민군 시절 사진 등 각종 증거자료가 충분했지만 정부는 그를 ‘불법 입국자’로 결론 내고 해외로 나갈 것(강제퇴거)을 명령했다.

그는 “정부 관리들은 동포애라고는 눈꼽만큼도 찾아볼 수 없었고 쫓아낼 궁리만 했다”고 진저리를 쳤다.

“지문 검사를 한다면서 손도장을 찍게 해 놓고 그 종이에 ‘중국 송환을 희망한다’는 거짓 진술서를 마음대로 작성하고, 내가 고향 사람이라고 증언한 탈북자들은 불이익까지 받았어요.”

그는 “타국 땅을 떠돌 때도 그렇게 홀대 받지는 않았다”고 털어놓았다. 김씨는 결국 98년 4월 전남 진도에서 또 다시 쪽배를 타고 일본으로 밀항했다.

일본 오오무라시 수용소에 수용됐다가 보석으로 가석방 조치된 후 일본 인권단체들의 도움을 받아 지난해 2월 단기 체류 형식으로 한국에 입국, 경기 안양시에 있는 새마을연수원에 머물러 왔다.

김씨가 천신만고”끝에 탈북자로 인정 받는 것도 일본 인권단체들의 도움이 컸다. 한국 국적을 얻게 됐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일본에서 축하 편지가 300여 통이나 답지했다.

“이제 홀가분한 마음으로 평범한 남한 사람처럼 살 것”이라고 다짐하는 김씨를 아직도 아프게 누르는 것은 북쪽의 가족들.

최근 북에 있던 아내와 남동생이 사형에 처해졌다는 소식을 접한 그는 아직도 가슴이 찢어진다.

“정부가 돈 몇 푼 쥐어 주고 탈북자 문제를 해결하려 하면 큰일이예요, 탈북자들이 남한 사회에 어울려 살 수 있도록 하는 게 무엇보다 중요합니다.”

그는 “그래도 주사 한대를 맞아도 17만원이나 내야 했는데 이제 의료보험이 될 테니 정말 다행이예요”라며 쓴 웃음을 지었다.

●김용화씨 탈북·망명 경로

①1988년6월,함남 단천에서 중국으로 탈출

②1992년 여름,주중 대사관에 망명 요청,실패

③1995년2월,주베트남 한국대사관에 망명 요청,실패

④1995년6월,0.5톤 소형배로 한구에 밀입국 시도

⑤1995년6월,충남 태안에 도착,귀순요청.

1998년3월 정부,김씨에 강제 퇴거 명령

⑥1998년4월,일본으로 밀입국 시도

⑦1998년7월,일정부,김씨에 강제퇴거 명령,나가사키 오오무라수용소 수감.

2000년3월,병보석 형식으로 가석방

⑧2001년2월,후쿠오카에서 한국으로 재입국

⑨2002년3월,한국정부,김용화씨 탈북자 인정

최지향기자

misty@hk.co.kr

■정부, 탈북자 파악 엄두도 못내

탈북자는 고립무원이다.

중국은 대북 관계와 체제 수호를 이유로 현상 유지를 바라고 우리 정부는 중국과 북한을 의식, ‘조용한 외교’를 최상이라고 믿는다. 그 공백을 비정부기구(NGO)가 힘겹게 메우고 있다.

탈북자가 목숨을 걸고 해외 한국대사관을 찾아 가면 “통일이 되면 만나자”며 돈 몇 푼을 쥐어 주고 내치는 게 관행으로 자리잡았다.

외교부 관계자는 “탈북자로부터 전화라도 오면 주재국 정부와 부딪쳐야 한다는 걱정이 앞서게 된다”고 털어놓았다.

이 때문에 탈북자 25명은 지레 손사래를 칠 게 뻔한 우리 공관 대신 인권문제에 민감한 유럽연합(EU)의 스페인 대사관을 찾았다.

김용화씨는 서울 땅을 밟은 후에도 중국의 압력에 눌려 오랫동안 국적조차 얻지 못했다.

정부는 탈북자 실태조차 파악하지 못하고 있다. 이들이 중국 각지에 숨어 지내는 데다 중국을 자극할 현장 조사는 엄두도 내지 못하는 형편이다.

통일부 당국자는 “현실적으로 규모를 알기 어렵고, 한국행을 바라는 탈북자를 구분하기란 불가능하다”며 “탈북자가 자력으로 한국에 와서야 대응이 가능하다”고 밝혔다.

실태 파악이 제대로 되지 않으니 탈북자 유입 대책도 엉성할 수 밖에 없다. 통일부가 1999년 7월부터 운영해 온 사회적응 교육기관 ‘하나원’의 수용능력(100명)은 이미 포화상태다.

새 건물을 짓고 교육기간을 3개월에서 2개월로 줄였지만 미봉책에 지나지 못했다. 국제 민간단체가 공언한 수백명 단위의 ‘기획 망명’은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상황이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탈북자들은 한국에 정착한 후에도 곤궁한 생활에서 벗어나기 어렵다.

통일부의 내부 자료에 따르면 국내 거주 탈북자의 20~60%가 무직자이고, 취업자의 65%가 1년 이상 한 직장에 머무르지 못한다.

탈북자동지회 안영길(安英吉) 사무국장은 “탈북자에 대한 부정적 인식이 널리 퍼져 있어 일자리 구하기가 대단히 어렵다”고 말했다.

정부는 한국행을 원하는 탈북자는 모두 수용한다는 정책을 보다 분명하게 천명하고, 중국 북한 등에 대한 외교력을 강화해야 한다.

또 탈북자의 대규모 입국 사태에 대비해 예산 지원을 늘리고 기업과 사회단체의 동참을 끌어내야 한다.

이는 과거 동독 탈주자에 대해 서독이 취한 정책이었고 통일을 앞당기는 데 결정적 역할을 했다.

탈북자 김모(47)씨는 “탈북자는 통일 후 남북의 가교 역할을 할 수 있다”며 “국민 모두 애정을 갖고 이 문제에 대응해야 한다”고 말했다.

이동준기자

djlee@hk.co.kr

■中, 탈북 러시 우려 난민인정 회피

탈북자 문제의 핵심은 중국 정부의 ‘난민(refugee)’지위 부여 여부이다.

한국 등 제3국행을 원하는 탈북자는 ‘불법 월경자’라는 멍에를 벗지 못하는 한 언제든 북한에 강제 송환될 수 있다.

국제 ‘난민협약’에 따르면 난민 지위는 유엔난민고등판무관실(UNHCR)이 심사하지만 주재국이 최종 결정한다.

중국이 ‘탈북자는 난민이 아니다’는 태도를 고수하는 한 난민지위 획득은 어렵다. 지난해 UNHCR이 길수군 가족에게 난민 지위 부여를 요청했음에도 중국이 단호하게 거부한 것이 좋은 예이다.

중국은 난민협약에는 가입했으나 관련 국내 규정과 법률은 갖추지 못한 상태다. 그러나 법체계 미비는 명목일 뿐 복잡한 정치적 이해가 더욱 큰 걸림돌이다.

‘혈맹’인 북한과의 관계를 고려해야 하는 중국으로서는 탈북자를 난민으로 인정할 경우의 탈북 러시를 우려하고 있다.

중국이 탈북자를 ‘경제 유민’으로 분류하는 경우도 이유는 마찬가지다. ‘종교나 정치적 견해 등을 이유로 한 박해의 공포 속에 모국을 떠난 사람’이라는 난민 규정에 해당되지 않는다.

이런 형식 논리와 달리 탈북자는 송환될 경우 정치적 박해가 예상되는 난민임에 분명하다.

지원단체 관계자는 “우리 정부가 적극적으로 난민 지위 부여를 요구하면 중국도 좀더 융통성 있게 대응할 것”이라고 주장했다.

난민은 망명자와는 구별된다. 일반적으로 망명은 A국 국민이 A국내 타국 대사관 또는 타국 영토로 가서 정치적 피신처 제공을 요청하는 행위이다.

국제기구의 난민 판정이 굳이 필요하지 않으며 망명 신청을 받은 국가가 전적으로 결정한다.

이동준기자 djlee@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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