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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아리] 일본 천황과 서울 월드컵

입력
2002.03.19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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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상 한반도에서 일본에 건너간 사람 가운데 제일 출세한 사람이 누군 줄 아느냐는 질문을 받으면 어떻게 대답해야 할까.10여년 전 어느 대학 교수가 일본에서 학자들과 만나 이런 질문을 받고 머뭇거렸다. 한참을 기다리던 질문자는 “바로 일본천황”이라고 말했다.

사석에서 농담처럼 한 말이지만, 그리고 절대 공식적으로는 입에 담지 않는 말이지만, 일본 학계에는 천황의 한국 혈통설이 낯설지 않음을 말해주는 일화다.

그 터부를 깬 사람은 놀랍게도 천황 자신이었다.

아키히토(明仁) 천황은 지난해 연말 기자회견에서 일본과 한국의 오랜 교류역사를 언급하면서 “간무(桓武)천황의 생모가 백제 무령왕의 자손이라고 속일본기(續日本紀)에 기록돼 있는 데서 나 자신 한국과의 연을 느낀다”고 말했다.

간무 천황 때 황태후 장사 치른 일을 기록하면서 “황태후의 조부는 백제 무령왕 아들 순타”라고 한 기사를 근거로 한 말이다.

그 때 우리가 주목했던 것은 그 사실 자체의 뉴스성보다, 그가 왜 그런 말을 했느냐 하는 배경이었다.

당시 일본 언론의 보도로는 미리 작성된 답변자료에 백제나 무령왕 언급은 없었다.

일본 정부와 사전에 그 문제에 관한 논의도 없었다니, 천황 자신의 ‘기획’으로 볼 수 밖에 없다.

반대를 의식한 즉석답변으로 보는 것이다. 그 회견이 일본에 어떤 반응을 일으켰는지를 보면 분위기를 짐작할 수 있다.

아사히 신문을 제외한 대다수 일본언론은 간단하게 보도하고 말았다. 황실 일이라면 미주알 고주알 옮기기로 유명한 TV 방송들도 혈통 부분은 보도하지 않았다.

더 주목해야 할 것은 왜 그런 말을 했느냐는 것이다. 천황은 평소 한국에 많은 관심을 표명해 왔다.

즉위한지 얼마 안돼 반대를 무릅쓰고 도쿄 국립박물관에서 열린 가야(伽耶) 문화전을 참관한 사실을 보도한 기억이 새롭다.

한국 대통령과 만날 때마다 일본이 한반도로부터 많은 문물을 받아들인 역사적 사실을 강조해 왔다.

역사교과서 문제로 양국 국민간에 감정의 골이 깊었던 2001년 4월에는 한국의 창작오페라

공연을 참관해 스포트 라이트를 받았다.

이런 배경으로 볼 때 그의 혈통 발언은 일련의 사교적 제스처의 연장으로 볼 수도 있다.

그러나 한일 공동주최 월드컵 개막을 6개월 여 남겨둔 타이밍으로 보면 다분히 의도된 언급으로 보아야 한다.

혈통발언 끝에 월드컵과 관련한 양국민의 협력과 신뢰회복을 강조한 말로도 그 속셈은 분명해 보였다.

20일자 뉴스 위크 보도를 보면 황실 측근인사는 “천황은 진심으로 월드컵 개막식에 참석하기 원한다. 그 발언은 자신의 생각을 반영한 것이다”고 말했다 한다.

재위 13년 기간 중 가장 의미심장하고 정치적인 발언이라는 평가도 있다.

그가 한국에 오고싶어 하는 데는 전후처리의 완결이라는 역사청산의 의지도 작용할 것이다.

미국 영국 네덜란드 같은 전쟁 당사국들을 두루 방문한 일본 황실외교의 블랙 홀은 한국이다.

전후 반세기가 넘는 갈등과 반목의 역사가 그렇게 만들었다.

우리 대통령의 공식초청을 받아놓고도 일본은 마음을 먹지 못한다. 흔쾌히 가슴을 열지 못하기로는 우리도 마찬가지다. 언제까지 이렇게 갈 것인가. 이 절호의 화해 찬스를 놓치고 말 것인가.

며칠 있으면 고이즈미(小泉純一郞) 총리가 온다. 천황 방한문제가 그의 보따리 속에 들었는지는 모르지만, 길을 닦을 기회도 이번이 마지막이 될지 모른다.

영국에서도 네덜란드에서도 아키히토 천황은 시위대를 만났다. 한국에서도 그럴 것이다. 그러나 그것을 겁낸다면 역사의 청산은 요원하다. 진정 새 시대를 열어갈 의지만 있다면 못 갈 곳이 어디겠는가.

문창재 논설위원실장

cjmoon@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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