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동을 무대로 한 미국과 이라크의 ‘부통령 외교전’에서 미국이 참패하고 있다.이라크 공격의 여론을 조성하기 위해 아랍 10개 국 순방에 나선 딕 체니 미국 부통령과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며 이라크의 2인자로 불리는 이즈자트 이브라힘 혁명지휘위원회(RCC) 부위원장 등 이라크 특사들도 거의 같은 나라를 방문했다.
그러나 체니 부통령은 방문국마다 별다른 지지를 이끌어내지 못한 반면, 이라크 특사들은 주변국과 외교 관계를 두텁게 하며 공격 반대 여론 만들기에 성공했다.
체니 부통령은 17일 걸프 지역 소국인 바레인을 방문한 자리에서 이번 아랍 순방 중 처음으로 이라크 공격에 대해 간접 지지 발언을 얻어냈다.
바레인의 살만 빈 하마드 알 칼리파 왕세자는 체니 부통령과의 회담에서 “이라크와 후세인을 공격하는 데 반대하지 않는다”며 “이라크는 걸프 지역의 피해를 막기 위해 유엔의 제제를 수용해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체니 부통령의 취임 후 첫 아랍국 순방에서 이제까지의 소득은 바레인이 고작이다. 지역 여론을 좌지우지하는 사우디 아라비아, 이집트, 요르단은 물론이고 미국과 대 테러전에 공조하고 있는 예멘도 이라크 공격은 반대했다.
심지어 이라크의 침공을 받아 여전히 불편한 관계인 쿠웨이트에서도 반대 여론이 거셌다. 알리 알무사 쿠웨이트 전 외무장관은 17일 “중동의 평화를 위해서는 이라크의 평화가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지적했다.
이 같은 결과는 당초 아랍국들이 아프가니스탄 전쟁과 이라크 공격을 다른 차원에서 이해하며 거의 대부분 반대 입장을 표시했기 때문에 적잖이 예상된 것이기는 하다. 하지만 같은 시기 맞불 공세에 나선 이라크의 외교 전략이 큰 몫을 했다는 분석이다.
외교전의 선봉에 나선 이브라힘 RCC 부위원장은 집권 바트당을 좌지우지하며 후세인 대통령 다음으로 막강한 영향력을 발휘하는 인물이다.
국제 인권단체 등으로부터 대량학살 혐의로 기소 대상에 올라 있는 그는 체니 부통령 순방 수 일 전 요르단, 시리아, 레바논을 먼저 방문했다. 13일 체니 부통령이 호스니 무바라크 이집트 대통령을 만난 다음 날에는 이브라힘 역시 이집트를 찾아 똑 같은 자리에서 무바라크 대통령과 환담했다.
그 뒤에도 체니를 바짝 뒤쫓아 아랍에미리트연합(UAE)과 카타르를 방문했다. 이브라힘은 2000년 걸프전 종전 10주년을 맞아 사우디를 방문, 압둘라 왕세자의 이마에 입까지 맞추는 우애를 과시한 바 있다.
여기서 그치지 않고 이라크는 북아프리카 아랍국에까지 여론몰이를 확대했다. 타레크 아지즈 부총리가 16일부터 리비아, 튀지니, 알제리, 모로코를 돌며 이라크 공격 반대 여론을 한 데 모으고 있다.
아랍 순방이 기대 이하의 결과를 낳음에 따라 이 달 26, 27일 레바논 베이루트에서 열릴 아랍정상회담에서 아랍국들의 지지 발언을 얻으려던 미국의 기대는 거의 물 건너 간 것으로 보인다.
아프간 전쟁이 도널드 럼스펠드 미 국방장관의 순방으로 아랍국의 지지 여론을 확보한 뒤 감행된 것을 감안하면, 실제 이라크 공격은 단기간에 실행으로 옮겨지기가 쉽지 않을 전망이다.
김범수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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