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제부턴가 두만강은 유민(流民)의 상징이 되었다. 한반도 북쪽에 극심한 가뭄이 들었던 1869년부터 관북지방 주민들이 강을 건너, 북간도 일대를 개간하고 고단한 삶의 뿌리를 내렸다.이민족의 압제를 극복한 그들은 1882년부터는 청조의 묵인 아래 합법적으로 농사를 짓게 되었다.
일제 강점기에는 수탈정책으로 삶의 터전을 잃은 유민들이 남부여대하여 이 강을 건넜다. 북간도는 이 땅에서 밀려난 사람들을 품어 준 어머니 같은 땅이다.
■ 동에서 서로 흐르던 유민의 물결이 역류한 때도 있었다.
1960년대 전반기 3년간 계속된 가뭄으로 대기근이 들자, 북간도 조선족 수만 명이 두만강 건너 북한의 일가친척과 친지들에게 생계를 의존했다.
양식을 얻어가려는 밀입국 행렬이 길었던 것은 오늘날 두만강변 북한유민 풍경과 다를 바 없다. 다른 것이 있다면 그 때는 몇 년 후 없어진 유민행렬이 지금은 10년 넘게 계속된다는 것이다.
은혜를 갚기에도 지쳤다는 말이 나올 만 하지 않은가.
■ 두만강 양안 주민의 삶이 역전된 것은 사유재산 인정에 관한 사회주의 정책의 차이 때문이다. 두만강에 가보면 그 차이가 한 눈에 들어온다.
무릎까지만 바지를 걷으면 건너갈 만한 물줄기를 따라 차를 달려보면 중국 쪽 농지에는 새벽부터 일하는 농부들 모습이 보인다. 그러나 강 건너 농경지에는 사람 구경하기가 어렵다.
개인의 영농권이 인정되기 전인 70년대 후반까지는 중국에서도 모내기 철이 40일이 넘었지만, 요즘은 일주일이면 끝난다.
■ 아무리 열심히 농사를 지어도 나라에 수확을 다 뺏기고 배급으로 사는 국유농장 시스템 아래서는 소출이 떨어지게 마련이다.
생산성을 높이는 길이 사유재산권 인정 뿐임을 모르는가. 굶주림에 지쳐 두만강을 건넌 탈북 유민 수가 3만여 명이라고도 하고, 10만 또는 20만 명이라는 주장도 있다.
첩보전 작전을 방불케하는 탈북자 25명의 주 중 스페인 대사관 망명은 그들 중 극히 일부의 행운이다. 개혁개방 정책 5,6년이면 해결된다는 식량 문제를 북한 당국이 언제까지 대외의존으로 풀어가려는지 답답하기만 하다.
문창재 논설위원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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