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5년 3월15일 선박왕 오나시스가 69세로 작고했다.터키의 이즈미르에서 부유한 그리스계 담배 상인의 아들로 태어난 오나시스는 10대때 그리스를 거쳐 아르헨티나로 이주했고, 그 곳에서 담배ㆍ양털ㆍ가죽 무역에 종사하며 장사를 배웠다.
그가 세계적 부호가 된 것은 해운업을 통해서다.
25세 때인 1931년 중고 선박 몇 척을 사들여 해운업에 손댄 그는 이내 유조선을 소유한 최초의 그리스인이 되었다.
많은 사람들을 불행으로 몰기 마련인 전쟁은 어떤 장사꾼들에게는 치부의 기회가 되기도 하는데, 20세기의 큰 전쟁들과 오나시스의 관계가 그랬다.
제2차세계 대전 중에 오나시스는 잉여선박 처분법을 통해 미국의 전시형(戰時型) 유조선들을 헐값에 사들임으로써 사업을 불렸고, 종전 뒤에는 미국 시민권을 지닌 두 아들 이름으로 뉴욕에 해운회사를 설립해 오나시스 해운왕국의 토대를 다졌다.
6ㆍ25전쟁이 몰고 온 해운업 붐은 그 왕국의 영토를 더욱더 넓혔다. 사우디아라비아 정부와 석유수송 독점계약을 맺은 1954년에 이르자 세계 해운업계와 석유업계에서 오나시스왕국의 패권은 거의 확실한 것이 되었다.
오나시스와 어울린 여성들도 저명한 인물들이었다. 그와 염문을 뿌린 그리스계 이탈리아 소프라노 가수 마리아 칼라스가 그렇고, 그와 재혼한 케네디 대통령 미망인 재클린 부비에가 그렇다.
특히 재클린과의 결혼은 결혼 자체의 의외성만이 아니라 전처 자식들과 재클린 사이의 거듭되는 불화로 호사가들의 입에 회자되었다.
그러나 그가 어울린 어떤 여성도 오나시스만큼 ‘저명’하지는 못했다.
오나시스는 자기 이름 안에 고대 그리스의 가장 유명한 철학자 두 사람을 모시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의 정식 이름은 아리스토텔레스 소크라테스 오나시스다.
고종석편집위원
aromachi@hk.co.kr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