꿰뚫는 듯한 강렬한 초록의 눈동자, 두려움에 가득찬 듯 하면서도 순진무구한 눈망울로 아프가니스탄의 고난을 역설적으로 증거한 ‘그 소녀’는 살아 있었다.형형하고 맑은 눈빛은 여전했지만, 가죽처럼 거칠어진 얼굴은 끊임없는 침탈과 전쟁에 시달려 온 한 여인의 신산한 삶을 말해주는 듯하다.
구 소련의 침공과 폭격으로 6세에 부모를 잃고 인접국 파키스탄의 난민촌을 전전했던 소녀의 이름은 샤르바트 굴라였다.
그녀는 17년 전 난민촌을 취재한 미국 사진잡지 내셔널 지오그래픽의 프리랜서 기자에 의해 1985년 6월호 표지 모델로 실려 전 세계에 큰 반향을 불러 일으켰고 사람들의 심금을 울렸다.
이 사진은 20세기의 명사진으로 남았다. 잡지사는 2001년 10월 ‘베스트 화보 100인선’특별판 표지 인물로 그녀를 다시 실었다
그녀를 촬영한 사진작가 스티브 맥커리(51)에게는 그녀의 소식을 궁금해하는 문의가 잇따랐다. 입양하겠다는 제의와 서방세계로 데려가 공부를 시키겠다는 제안도 많았다.
촬영 당시 통역을 대동하지 않아 12, 13세 나이라는 것 외에 소녀의 이름조차 알지 못했던 맥커리는 그 동안 10여 차례 이상 아프가니스탄과 파키스탄 취재를 떠났을 때 행방을 수소문했으나 찾지 못했다.
아프간 전쟁이 시작된 후에는 그녀를 다시 찾자는 여론이 미국 내에서 일었다. 1월 내셔널 지오그래픽의 지원을 받아 수색팀까지 만든 맥커리는 드디어 그녀의 소재를 파악했다.
어렵사리 부르카를 벗기고 사진을 찍은 맥커리는 연방수사국(FBI)의 홍채 인식 및 얼굴 인식 기술까지 활용해 그 때 그 소녀임을 확인했다. 성인이 된 그녀의 모습은 이 잡지의 4월호 표지에 다시 한번 실린다.
그녀가 1990년대 중반 귀향한 곳은 알 카에다 소탕을 위한 미군의 공습이 집중됐던 동부 토라 보라 산악지대였다. 30년 가까운 그의 인생은 소련과 미국의 침공에다 끊이지 않은 내전으로 찢겨 나간 아프간의 상처를 그대로 안고 있었지만 딸 셋을 둔 평범한 파슈툰족 주부가 됐다.
스스로 정확한 나이를 모르지만 29세나 30세 정도로 추정된다. 남편은 빵을 구워 판다. 세월은 그의 모습을 적지 않게 바꿔 놓았다.
얼굴은 거칠어졌고 날렵했던 턱 선은 무디어졌다. 그래도 17년 간 세계의 독자를 사로 잡았던 코발트 그린의 강렬한 눈동자만은 여전했다. 그녀는 자신이 이 잡지 표지에 실린 것도, 유명한 사람이 되어 있는 것도 모르고 있었다.
그의 고단한 삶은 1980년대 소련의 아프간 침공으로 시작됐다. 소련의 폭격으로 부모를 여읜 굴라는 할머니의 손에 끌려 4남매와 함께 파키스탄으로 피난을 갔다. 난민촌을 전전하며 하루 벌어 하루 먹고 살았던 그 곳에서 결혼을 하고 10여 년 전 고향으로 돌아왔다. 고향 마을은 밀과 쌀 농사를 조금 할 뿐 학교나 병원, 변변한 도로나 수도도 없는 곳이다.
맥커리와 만난 굴라는 그를 기억하고 있었다. 취재 당시 식사 시중을 들고 있었던 굴라는 “요리하다 불에 그을리는 바람에 머리에 구멍이 나 있었다”고 기억했다.
“소련 침공 때에 비하면 탈레반 치하는 그래도 나았다”고 말하는 그는 “아이들이 내가 누리지 못했던 교육의 혜택을 받을 수 있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내셔널 지오그래픽은 후원자들이 내놓은 돈으로 굴라와 그의 가족들에게 물질적인 도움을 줄 방법을 논의 중이다. 또 이번에 얻어지는 수익으로 아프간 여성들의 교육을 지원하기 위해 ‘아프간 여성 기금’도 조성하고 있다.
미국의 MSNBC는 15일 그녀를 다시 찾은 이야기와 그녀의 삶을 담은 다큐멘터리를 방영한다.
김범수기자
bskim@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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