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이 소련 지도자 조지프 스탈린을 ‘엉클 조’(Uncle Joe)라고 부른 적이 있다.악명 높은 독재자를 미국 자신의 애칭 ‘엉클 샘’처럼 친근하게 부른 계기는 1941년 대 나치 전쟁에서 동맹 관계가 된 것이다.
소련과 스탈린의 악덕을 과장했던 미국 정부는 새 우방의 이미지를 미국의 도덕적 이상과 모순되지 않도록 개선해야 했고, 이에 따라 언론을 통한 대대적인 스탈린 띄우기에 나섰다.
물론 스탈린의 호사(豪奢)는 오래가지 않았다. 전쟁이 끝나자 스탈린과 소련은 ‘악의 화신’으로 되돌아갔다.
영국의 역사학자 E. H. 카는 일찍이 이런 미국의 위선적 외교 행태를 두고 “미국은 이기적 국익을 공동선의 허울로 치장하는데 선수”라고 규정했다.
그러면 미국은 왜 위선적 대외 행보를 거듭하고, 또 미국인들은 스스로 감동하는 이상주의 수사(修辭)와 이기적 행태가 모순됨을 느끼지 않는가.
숱한 이론이 있겠지만, 시카고 대학의 저명한 국제정치학자 존 메어스하이머는 저서 ‘초강대국 세력정치의 비극’에서 이렇게 설명한다.
이상주의를 신봉하는 미국인들은 현실주의 정치를 혐오한다. 이 때문에 정치인은 물론이고 학자들도 흔히 외교 정책을 도덕주의와 자유주의의 틀에서 논한다.
그러나 밀실에서 국가 안보정책을 결정하는 엘리트들은 원칙이 아닌 힘의 논리를 따르며, 미국의 대외 행보는 현실주의 논리를 추구한다.
이 명백한 괴리를 메우기 위해 정부는 스탈린의 경우와 같은 선전 캠페인을 동원한다.
그러나 냉혹한 국익 계산을 이상주의 명분으로 포장한 정부의 논리를 미국인들이 늘 쉽게 수용하는 근본은 미국의 도덕성에 대한 맹목적 믿음, 바로 ‘미국 예외주의’(American Exeptionalism) 신념이다.
정치학도의 상식을 길게 얘기한 연유는 9ㆍ11 테러 6개월에 즈음, 미국이 오만한 일방주의를 계속 좇는 듯 하면서도 국제 여론을 돌보는 제스쳐를 취하는 의도를 헤아리려는 것이다.
미국은 대 테러 전쟁을 수행하면서 전통의 우방과 러시아와 중국 등의 지원을 이용했으나, 전쟁이 성공적으로 진행되자 그 공헌을 무시했다.
오히려 우방의 이해와 충돌하는 ‘악의 축’ 발언과 이라크 공격 선언으로 반발을 불렀다.
이어 솔트 레이크 동계 올림픽을 미국의 위세 회복을 과시하는 기회로 삼아 외부의 모멸감과 배신감을 부추겼다.
이슬람 권만 아니라 우리나라와 유럽 등의 반미 분위기가 한껏 고조된 상황에서 9ㆍ11 테러 6개월을 맞은 부시 대통령은 일방주의를 다시 수정하는 듯한 모습을 보였다.
백악관 추모 행사에 각국 대사 100명을 초대, 우방국 대사 여러 명에게 연설 기회를 주고 함께 사진도 찍었다. ‘악의 축’ 과 이라크는 언급하지 않은 채, 우방의 기여와 국제 연대를 강조했다.
이런 변화를 미국 안에서도 고조되는 비판을 수용한 긍정적 조짐으로 볼 수 있다.
그러나 유엔 회원국 숫자에 버금가는 170개국 국기를 내건 축제 같은 행사에서 미국과 부시 대통령의 세계 질서 주도의지를 거듭 과시했을뿐이란 비아냥도 나온다. 더욱이 이 행사 직전, 북한 등 ‘악의 축’ 세 나라에 중국과 시리아 리비아 등까지 선제 공격할 수 있는 미니 핵폭탄 개발 계획을 언론에 흘린 것은 이중적이고 위선적인 대외 정책의 전형으로 지적된다.
특히 불과 얼마 전 화기애애한 정상 회담으로 우호 협력을 다짐한 중국과, 오랜 봉쇄를 허물고 은밀하게 호혜적 석유 사업을 진행중인 리비아까지 새로이 위협한 것은 파행적 외교 안보전략이란 비판을 불렀다.
이에 따라 부시 행정부를 주도하는 공화당 강경파의 오만한 일방주의의 바탕에 외부 세계를 오로지 위협으로 간주하는 불안한 정서가 깔려 있다는 분석마저 낳고 있다.
클린턴 행정부 국방차관을 지낸 정치학자 조지프 나이는 이런 자폐적 오만과 일방주의로는 미국이 21세기 세계를 주도할 수 없다고 경고한 바 있다.
그 것이 그가 최근 저서의 제목 삼은 ‘미국 파워의 역설’일 것이다.
강병태 편집국 부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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