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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달영 칼럼] 오징어냐, 백로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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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달영 칼럼] 오징어냐, 백로냐

입력
2002.03.13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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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산(茶山) 정약용의 시편들 중에 오징어를 등장시킨 것이 있다. 오래 전 어느 글에서 그 시의 우의(寓意)를 인용한 적이 있다. ‘오징어 시’를 다시 읽는다. 이런 내용이다._어느날 물가에서 오징어와 백로가 만났다. 눈같이 희고 고고한 백로에게 오징어가 먼저 말을 건넨다.

“자네 역시 고기 잡아먹고 살기는 나나 마찬가진데 청절(淸節)은 뭣하러 지키나. 나로 말하면 뱃속 먹물 냅다 뿌려 고기를 정신잃게 한 뒤 쉽게 잡아먹고 살지만, 자네는 흰 옷이 너무 튀어서 고기들이 먼 데서도 알아보고 지레 피해가는 것이 아닌가. 그러니 늘 배곯아가며 다리 아프게 서있을 수밖에 없는 거지. 그럴 게 아니라, 까마귀 찾아가서 그 날개 빌려 바꿔입고 적당히 편히 사는 방도를 찾아보도록 하게나. 처자식도 먹여살려야 하거늘.”

백로가 대답한다.

“자네 말도 일리가 있네만 이 결백은 하늘이 주신 것이고 아무리 봐도 더러운 곳 없으니, 내 어찌 이 작은 배 채우려 내 모양까지 바꾸겠나. 고기가 오면 잡아먹고 달아나면 좇지 않아 이대로 꼿꼿이 서서 천명을 기다리겠네.”

오징어가 화를 내고 먹물 뿜어내며 소리친다.

“바보로구나, 백로여. 너 굶어죽어 마땅하구나!”

이 시에서, 오징어가 천박한 현실주의자라면 백로는 고결-청빈한 선비 상(像)이다. 한 가지 관점(觀点)이 이 쯤에서 감지된다.

시인 다산이 편들고 싶지 않았던, 또는 비판하고 싶었던 가치관은 정작 어느 쪽인가 하는 것이다.

그 답은 아마도, 불한(不汗)의 지식인 상이었을 것이 틀림 없어 보인다. “바보로구나!” 통렬한 매도를 어쩌면시인 자신에게 퍼붓고 있다.

민주당 대통령후보를 결정하는 국민경선에 나선 ‘7룡’가운데서 김근태는 지금 ‘바보’이자 ‘왕따’다.

그는 2년 전 당 최고위원선거에서 쏟아부은 위법한 정치자금을 ‘고해성사’했다가 거듭거듭제 발등만 찍히는 ‘심판’을 받는 중이다.

“혼자만 깨끗한 체”한다거나 ‘이회창 빌라 게이트’ ‘권노갑 돈까스 코미디’ 등으로 희화화- 정쟁화(政爭化)하는 잘못된 파장(波長)은 그런대로 견딜수도 있는 일이지만, 제주 경선 16득표에 이은 울산 10표 등 ‘1%대 지지율’로 돌아온 현실의 응답은 그야말로 처절한 것 이상이다.

“이럴 줄 몰랐다. 끝까지 가겠다.”는 그의 소감을 전한 한국일보의 정치기사는 “젖은 목소리로” 라고, 굳이 정의적(情意的) 표현을 쓰고 있다. 그는 울고 있었을 것이다.

제2, 제3의 고해성사 대열에 나서는 정치인이 없음은 김근태의 불운이자 우리 정치의 실패다.

그가 철저히 ‘오징어’되어 현실적응도 제대로 못하고, 완벽히 ‘백로’되어 현실에 단호하게 “노!” 하지도 못한 것은 정치인으로서의 김근태 개인의, ‘어정쩡’하게 살아가는 우리 모두의 한계요 비극일 것이다.

그는 정치자금 문제의 개혁을 위한 제물됨을 자임한 ‘바보’다. 그의 대선후보로서의 지지율은 더 이상 관심사가 아니어도 그만이다. 다만 중요한 것은 그를 ‘바보’로 만든 우리가 반드시 성취해서 응답할 내용이 무엇이어야 하는가다.

제주_울산을 거쳐 지금 광주_대전으로 옮겨 가고 있는 국민경선에서도 여전한 ‘돈 질’ 정치를, 당내 경선에서조차 되살아나는 지역주의 행태와 더불어 동시 청산하는 것이 그 내용이어야 한다.

지역성에 과연 변화를 보일 것인지, 그를 언제까지 바보로 머무르게 할 것인지, ‘광주’는 여러 모로 궁금하다.

칼럼니스트

assisi60@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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