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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평생 잊지못할 일] 한국전쟁 인민군 포로 시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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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평생 잊지못할 일] 한국전쟁 인민군 포로 시절

입력
2002.03.12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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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0년이나 살다 보니 여러 번 죽음의 고비가 있었다.1943년 말 나는 일제 학도병으로 나가라는 지시를 받고 고이소 총독한테 따지고 덤볐다가 사형을 당할 뻔했다.

학병에 끌려가서 B-29 폭격기의 공습을 받고, 불과 1㎙ 주변에 ‘따따따’ 기관총 소사를 받으면서 몇 차례 죽음의 고비를 넘나들었다.

가장 잊을 수 없는 일은 한국전쟁 때이다.

‘뻥뻥’ 들려오는 포성이 무서워 서울 한남동 하수구에서 밤을 새고, 나는 훤해진 밖으로 나왔다.

깜짝놀랐다. 붉은 기를 나부끼며 강가로 달려가는 인민군 지프차가 보였다. 나와 함께 하수구 속에서 밤을 새웠던 남로당원이라던 대학 친구가 말했다.

“자넨 방송국에 나가던 사람이니 전범에 몰리면 사형을 당할 게 뻔해. 지금 이 사람들한테 한 마디 하라구.”

나는 겁을 먹고 동민들한테 한마디 했다.

“저기 붉은 기를 단 인민군 지프차가 달려가고 있습니다. 이승만 정권은 우리를 버리고 가버린 것입니다. 저 사람들이 좋은 세상을 만들어 줄지도 모르니, 한번 겪어 봅시다.”

나는 1주일 동안 공산당원이 되려고 여기저기 기웃거려 보았지만 허사였다. 의용군으로 나가서 충성심을 보이라고 했다. 나는 의용군에 끌려가다가 중간에 도망쳤다.

북에서 내려온 중학교 동창이 가짜 신분증을 만들어 주어 ‘서울 100일’을 견뎌냈다. 9ㆍ28 수복 때 미군이 들어왔다.

나는 뛰어나가서 ‘웰 컴’을 외쳤다. 그랬더니 우리 옆집에 사는 초등학교 선생이 나를 공산주의자라고 손가락질 했다.

미군이 권총을 들이대며 인민군 포로 맨 앞에 세웠다. 나는 “아임 낫 어 커뮤니스트”라고 열심히 외쳤다.

그런데 미군은 “셧업”하며 권총을 눈 앞에 들이댔다. 배를 타고 한강을 건너갔다.

허허벌판이었다. 거기에서 인천형무소로 끌려갔다. 모두 인민군 뿐이었다. 이틀을 지낸 후 심사라는 것을 받았다. 검열관이 인상을 찡그렸다.

“C급 이군요. 공산주의자 입니까?” “아닙니다.” “뭘 했습니까?” 사연을 이야기 했다.

“큰일 났군요. 이대로는 포로가 되겠어요.” “학교가 어딥니까?” “서울대 문리대 불문과입니다.” 그 사람이 깜짝 놀라며 일어났다.

“전 영문과입니다.” 그는 나갔다가 한참 뒤 돌아오더니 “B급으로 해 놓았습니다. 나가게 될 것입니다”고 말했다.

이튿날 나는 석방됐다. 인천에서 서울까지 걸어오면서 브노아 메샹의 ‘40년의 수확’을 떠올렸다. 구사일생의 고비였다. 나는 아직까지도 그 후배의 이름을 모른다.

한운사·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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