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털제거ㆍ피부관리ㆍ카디건 유행…뽀얗고 깔끔한 남성이 뜬다탤런트 원빈이 몰고 왔던 꽃미남 열풍이 10~20대는 물론 중ㆍ장년 남성들의 일상까지 파고 들고 있다.
부리부리한 눈매, 단단한 어깨 근육을 자랑하던 마초(macho)들은 이제 설 자리를 잃고, 대신 뽀얗고 고운 피부와 깔끔한 외모의 남성들이 우리 사회의 멋진 인물로 환영받고 있다.
남성의 여성화 바람은 이제 더 이상 혐오스런 현상이 아니며, 부러움을 사던 남성적 상징들은 돈을 들여서라도 없애야 할 거추장스런 장애물로 전락했다.
▼‘남성성’이 사라진다
회사원 김 모(29)씨는 최근 400여만원을 들여 레이저 수술로 팔ㆍ다리의 잔털을 모두 제거했다.
북실북실 털이 나 있던 그의 팔다리는 마치 스타킹 광고에 나오는 여성 모델처럼 매끈해졌다. 그는 “털은 징그럽고 짐승 같은 것”이라고 말했다.
남성이 전체 환자의 20~30%를 차지하는 서울 강남의 테마피부과에는 하루 10여명이 넘는 남자들이 제모수술을 받으러 찾아온다.
튼튼하고 억센 터프 가이(Tough guy)의 상징이자 강한 성적 코드였던 가슴 털을 과감히 밀어버리기도 한다.
야성미의 상징이었던 구레나룻과 턱수염도 이제 영구제모의 대상이다. 면도하기 귀찮아서가 아니라 그냥 ‘털이 싫어서’다.
테마피부과 임이석 원장은 “제모하는 사람들이 머리를 ‘심으려는’사람 못지않게 많아지고 있다.
털의 의미가 180도 달라진 걸 실감한다”고 말한다.
요즘 눈썹을 심는 남자들은 ‘숯검댕 눈썹’대신 여자처럼 날렵하고 유연한 초승달 모양으로 해달라고 주문한다. 털 심는 모양새도 확연히 달라진 것이다.
▼달라진 미적기준
날카롭고 부리부리한 눈매도 이제는 인기가 없다. 둥글고 선량해 보이는 눈매를 위해 쌍꺼풀 수술까지 한다.
서울 강남의 박현성형외과 박 현 원장은 “매섭고 강인한 인상이 싫다고들 한다. 큰 절개선 대신 속쌍꺼풀을 여자들처럼 넣어 준다”고 말한다.
얼굴살이 빠져 움푹 들어간 볼에 불룩 튀어나온 배의 불필요한 지방을 떼어내 메우기도 한다.
이른바 ‘자기지방주입술’이다. 과거 날카로운 윤곽은 ‘고뇌하는 지성인’처럼 보였지만, 지금은 둥그스름한 미소년형에 밀리고 있다.
▼패션의 여성화바람
패션의 여성화 바람은 이제 새로울 것도 없는 ‘메가트렌드’이다.
다니엘에스떼, 솔리드옴므, 엠비오 등 대부분 남성브랜드에서는 어깨를 딱딱하게 보이기 위해 넣었던 ‘심’을 뺐다.
허리선도 여자들처럼 트임이 들어가 날씬해 보인다. 능력있는 남자의 상징이던 빳빳한 와이셔츠 깃도 한결 부드러워졌다.
권위를 세우기 위해 가슴 부분에 넣었던 부자재도 유연한 소재로 바뀌었다. 다니엘에스떼 지승희 디자인실장은 “요즘 ‘배용준 패션’으로 불리고 있는 카디건도 여성패션의 영향”이라고 말한다.
요즘 유행하는 카디건은 셔츠 위에 걸쳐 입던 박스형의 ‘아저씨 카디건’이 아니라 여성복처럼 라운드 티셔츠나 터틀넥을 맞춰 입을 수 있는 앙상블 형식이다.
서울 강남에서 박영덕화랑을 운영하는 박영덕 사장은 수년 전부터 넥타이를 매지 않는다.
프라다 천(코팅한 나일론) 소재의 캐주얼 바지를 즐겨 있고, 선이 부드러운 니트나 남방셔츠 차림을 즐긴다.
그는 “서울의 강남 거리를 보면 남성들의 옷차림이 확실히 부드러워지고 화려해졌다”고 말한다.
▼관리의 일상화
한 번의 시술, 한 번의 쇼핑으로 꽃미남이 유지될 수는 없다. 깨끗하고 고운 외모를 갖기 위해서는 정성 들여 관리하고 투자해야 한다.
강남 신사동의 ‘정현정파라팜’의 정혜정 피부관리 실장도 “과거엔 고민거리가 아니었을지 모르지만, 최근엔 얼굴에 기름이 번들거린다며 세안방법을 고민하다 찾아오는 손님들도 많다 ”고 말한다.
지성피부 때문에 아내의 손에 억지로 끌려 왔다 이제는 오히려 혼자 몰래 피부관리실을 찾는 남자도 있다.
소공동 롯데백화점 손톱관리매장 ‘쎄시’에는 일주일에 10명이상의 남자들이 쿠폰까지 끊어와 손 관리를 맡긴다.
피부전문브랜드 ‘비오템’ 판매담당 공은혜씨는 “지난해 남자는 전체 고객의 5%미만이었지만 올해 들어선 15~20%로 늘어났다. 손님층도 20대 초반에서 30대 까지 다양해졌다. 30만원 이상의 제품도 서슴없이 구매한다”고 말한다.
직업상 일상적 관리가 필요한 경우도 있다. 피부과ㆍ성형외과 의사들의 피부가 유달리 좋은 것은 ‘고객관리’ 차원에서 스스로 피부에 공을 들이기 때문이다.
한 성형외과 개업의는 “4년전부터 노화방지제인 고단위 레티놀을 바르고 있다. 혼자 거울보고 피부 박피도 세차례나 했다. 오랜 만에 만나는 사람들은 나를 못 알아볼 정도”라고 털어놓는다.
네오성형외과 심형보 원장은 평소 오이마사지로 피부를 가꾸고 있다. 그는 옷도 모두 직접 사 입는데 단신, 배가 나온 결점을 보완하는데 특히 신경을 쓴다.
적극적으로 매장을 찾지는 않더라도 누이나 아내 등 여자의 화장품을 덜어 쓰는 남자들도 많아졌다. 애프터 셰이브 같은 전통적인 남성화장품의 강한 향을 싫어하기 때문이다.
화장품 업계도 이같은 남성 소비자의 까다로운 안목에 발 빠르게 움직여, 각종 기능성 남성화장품을 내놓고 있다.
업계가 추산하는 올해 남성화장품 시장규모는 지난해보다 600억원 늘어난 2,600억원대.
중건성, 중지성 등 피부 타입별 제품에서부터 주름예방, 각질 제거, 피지조절, 보습, 미백크림 등다양한 기능성 화장품이 선보이고 있다.
혈색을 밝게 해주는 크림(아라미스)에서 스트레스를 개선하는 화장품 ‘댄하버’(CJ엔프라니), 유수분의 균형을 잡아주는 화장품(소망)까지 나와있다.
칫솔과 치약만 달랑 놓여있던 남자직장인의 사무실 책상에는 이제 스킨 로션에서 핸드크림, 헤어무쓰, 젤, 거울 등 각종 화장품과 화장 도구들이 즐비하게 놓여 있다.
‘담배 때문에 칙칙해진 피부를 어떻게 관리할 것인가’ ‘전날 과음으로 까매진 눈 밑을 어떻게 가릴 것인가’가 이제 남성들의 보편적인 대화 내용으로 자리잡게 됐다.
양은경기자
key@hk.co.kr
■왜 여성화 인가…"인류 진화 방향" 주장도
왜 남성적인 상징이 없어져 갈까. 삼성패션연구소 서정미 수석연구원은 “남자들의 감성이 자유로워졌고 남자를 보는 기준도 달라졌기 때문”이라고 한다.
굳이 어떤 성별의 특징이 없어졌다기보다는 ‘남자는 이러해야 한다’는 고정관념으로부터의 해방으로 보는 게 타당하다는 것이다.
이는 직급이 낮아도 능력 있으면 인정받는 임금체계의 유연화와도 관계가 있다. 자율과 창의성이 지배하는 탈산업사회의 요구방향이기도 하다.
지난해 ‘나는 미소년이 좋다’를펴낸 문화비평가 남승희씨는 “그냥 지나쳐가는 트렌드가 아닌 인류진화의 방향”이라고까지 단언한다.
‘몸가꾸기’가 시각적 욕망에 지나치게 흔들리는 병리적인 속성도 있지만, 생물학자 린 마굴리스의 이론처럼 성과 생식이 분리된 현대 사회에서는 남성이 더 이상 ‘수컷’일 필요가 없고 오히려 호전성을 잠재우는 게 진화의 방향이라는 주장이다.
그렇다면 우람한 근육, 위엄있고 권위적인 의상 등 ‘마초’의 상징들은 영원히 사라졌을까.
서 연구원은 “복고로의 회귀도 가능하다. 부시 정부하의 미국 사회가 테러 이후 캐주얼 대신 비즈니스 정장이 늘어난 것도 이러한 가능성을 보여준다”고 말한다.
그렇지만 적어도 우리 사회에서는 앞으로 몇 년간은 역풍이 불 가능성은 없으며 큰 줄기는 어디까지나 ‘캐주얼화’와‘유연화’라고 분석한다.
남씨도 “‘부드러운 남자’들에게 물리면 막강한 근육을 자랑하는 ‘어깨맨’이 인기를 얻을 수도 있겠지만 근육미에 대한 정의가 바뀔 것”이라고 예상한다.
완력으로 군림하는 종전의 마초 대신 순진하고 귀여운 어깨맨이나 스포츠와 춤을 즐기는 잘 빠진 야한 남자와 같은 유형이 인기를 얻게 된다는 것이다.
양은경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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