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30년 3월8일 한국의 첫 비행사 안창남이 중국에서 비행기 사고로 작고했다. 향년 30세. 서울 무악재에서 태어난 안창남은 네 살 때 어머니를 여읜 뒤 미동 공립보통학교를 졸업했으나 15살에 아버지마저 세상을 떠나자 학비가 없어 휘문고보를 중퇴했다.그 즈음 미국인 비행사 스미스의 시범비행을 보고 비행사가 되기로 결심한 그는 결혼 뒤에 일본으로 건너가 아카바네(赤羽) 비행기제작소에서 비행기제조법을 배운 뒤 오쿠리(小栗) 비행학교에서 조종술을 배웠다.
안창남은 1921년에 비행사 시험에 합격해 이 해 도쿄(東京)와 오사카(大阪)를 오가는 우편비행기의 조종사가 됐고, 이듬해 동아일보사 후원으로 고국 방문 비행을 해커다란 환영을 받았다.
비행 이튿날인 1922년 12월11일자 동아일보는 전날 여의도의 광경을 이렇게 보도했다. “기다리는 날이 왔다. 조선의 비행기가 조선의 하늘에서 처음으로 나는 날이 왔다. 여의도 마당은 넓으나 만여 명의 학생과 수만의 군중으로 인산인해를 이루었다.
안군의 고국방문비행을 손꼽아 고대하던 삼십만의 경성부 인민은 너나 할 것 없이 모두 그 장쾌하고 의미있는 비행을 구경하기 위하여 혹은 열차로 혹은 도보로 넓은 벌판으로 향하였는데 오전 열시가 지나고 열한시가 되매 사면에서 구름같이 모여드는 군중은 그 수효가 무려 오만 명에 달하여 광막한 여의도 벌판은 사람으로 바다를 이루게 되었다.”
그 즈음 조선 사람들은 전래 민요인 ‘청춘가’의 가사를 이렇게 바꿔 부르곤 했다. “떴다 보아라 안창남의 비행기, 내려다 보니 엄복동의 자전거.” 역시 서울 출신으로 전조선(全朝鮮)자전거 경기대회에서 일본 선수들을 물리치고 두 차례나 우승한 엄복동(嚴福童)의 쾌거를 안창남이 하늘에서 이룬 쾌거와 병렬시킨 것이다.
고종석 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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