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생활의 역사/필립 아리에스, 조르주 뒤비등 지음ㆍ주명철 등 옮김/새물결발행ㆍ전5권/각 권 4만3,000원로마시대의 신생아는 태어난다고 해서 모두 살아 남는 것은 아니었다. 신생아의 생존 여부는 전적으로 아버지의 손에 달려 있었다.
아버지는 자식이 태어나면 ‘친자로 인정하고 버리지 않겠다’는 의사 표시로 산파가 땅에 내려놓은 아기를 들어 올리는 특권을 행사했다.
궁정과 정치를 중심으로 한 역사에서는 드러나지 않지만, 로마시대의 기아(棄兒)관습은 엄연한 사실이었다.
19세기 유럽의 지배계급은 닥치는대로 물건을 수집했다. 골동품 상업이 체계화한 것도 이 무렵이다. 신흥 부르주아들이 새로이 획득한 지위를 정당화시키겠다는 욕구 때문이었다.
‘사생활의 역사’는 고대 로마제국부터 1980년대에 이르기까지 역사의 뒤켠에 밀려있던 인간 삶의 반쪽, 사생활의 영역을 부활시킨 방대한 책이다.
전 5권 중 1,3,4권이 번역출간됐다. 2, 5권은 5월말 출간 예정이다.
이전까지의 역사가 인간의 삶을 거실이라는 공적인 공간에서 이뤄지는 것으로 보았다면 ‘사생활의 역사’는 다락방과 침실, 그리고 지하실까지 역사의 영역으로 부활시켰다.
하지만 제목이 주는 선입견에 이끌려 인간 삶의 내밀한 부분이나 어떤 비밀스런 영역을 엿볼 생각으로 이 책을 접한다면 오산이다.
이 시리즈는 마치 한 시대의 박물지처럼 인간삶의 생생한 현장을 살았던 남성과 여성, 그들의 사고와 감정, 몸, 태도와 관습, 기호를 현미경을 들이대듯 관찰하고 양피지 문헌, 비단옷과 승려복, 그리고 저택의 돌에 새겨져 있는 이미지까지 추적해 역사를 기술하고 있다.
권당 900여쪽에 가까운 방대한 분량이다. 그럼에도 이 시리즈는 프랑스에서만 20만 질이 팔려나가는 등 유럽의 모든 나라에서 상업적 베스트셀러 만큼이나 많이 팔려나갔고 동시에 ‘역사연구의 신기원을 이룬 기념비적인 명저’라는 학문적 평가를 받았다.
그 이유는 시리즈의 공동 책임 편집자인 조르주 뒤비(1919~1996)가 책머리에서 밝힌 내용에서 유추해볼 수 있다.
“사생활의 영역과 그것을 둘러싼 관념은 끊임없이 변화하고 있다. 오늘날 기술은 사생활의 마지막 성벽을 무너뜨리는 동시에, 개인을 방대한 데이터뱅크 속의 숫자로 만들어 버리고 말것이다. 지금이야말로 인간의 본질을 보전하고자 노력해야 할 때가 아닐까.”
인간 본질의 중요한 측면이지만 역사에서 소외됐던 사적 영역의 복원이야말로 오늘 우리의 모습을 온전하게 바라보는데 있어 꼭 필요한 부분이라는 것이다.
이 시리즈의 완간을 목전에 두고 사망한 프랑스 재야 사학의 대가인 필립 아리에스(1914~1984), 콜레주 드 프랑스의 중세사 담당 교수였던 조르주 뒤비가 책임 편집을 맡았고, 40여명에 달하는 소장 학자들이 대거 집필에 참여해 10여년의 세월에 걸친 작업 끝에 완성했다.
하지만 ‘사생활의 역사’ 시리즈는 아날학파의 이른바 미시사와는 다소 거리가 있다. 오히려 풍속사와 예술사, 정치사, 상체계의 역사, 일상사 등을 결합시키는 하나의 ‘거대한 박물지’에 가깝다.
이 책은 서양사, 그 중에서도 유럽사에 국한됐다는 점이 아쉽다.
하지만 필자들의 작업은 사생활의 각 영역을 다룬 주제를 장강처럼 유유히 흘러가게 하면서, 역사 서술의의 미답지들을 촉촉히 적셔주고 있다.
인간 이해를 돕는 한편의 대하 드라마로 감상해도 손색이 없다.
김영화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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