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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움직인 이 책] 법정 '텅빈 충만' '물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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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움직인 이 책] 법정 '텅빈 충만' '물소리…'

입력
2002.03.08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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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까지 살아오면서 꽤 많은 책을 읽었습니다. 그렇지만 철이 없던 시절에는 철이 없던 대로, 철이 좀 들었을 때에는 철이 좀 든 대로, 근거없는 자만심은 여전했던 것 같습니다.고전이든 명저든 대충 “아, 이 정도인가” 하는 식이었습니다. “음, 내 생각과 비슷하군”이라든지 “뭐, 별로 특별한 것도 없지 않아?”라는 식으로, 한 마디로 아무 것도 없으면서 건방지기만 했던 시절이었습니다.

그러다가 1996년 모 연구소에 책임연구원으로 근무하면서 인생이 힘들어지기 시작했습니다. 맡겨진 과제도 힘들고 조직 내에서 인간관계도 힘들었습니다.

“마음 속으로 찬 바람이 서늘하게 지나간다”는 표현이 그냥 수사학적인 표현만이 아니라는 것도 깨닫기 시작했습니다.

반년만에 사표를 내고 정신적인 공황상태에 빠져 들었습니다. 1997년 여름 안사람이 둘째 아이를 가졌습니다.

“아무 것도 가진 것이 없는 지금 둘째 아이까지 어떻게 감당할까.” 불면증이 시작되었습니다.

1998년 봄 둘째 아이가 태어났습니다. 산모 조리실에서 넋을 놓고 이제 막 태어난 아이를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무심히 산모 조리실에 구비된 책꽂이에서 법정스님의 ‘텅 빈 충만’이라는 책을 펼쳐보았습니다.

“요즘 나는 오전 한때를 후박나무 그늘에 앉아 조촐하고 맑은 시간을 보내면서 나무의 덕을 입고 있다”로 시작하는 책이었습니다.

나는 아직도 후박나무가 어떻게 생겼는지 모릅니다. 그런데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그 ‘후박나무’가 오랜만에 마음에 평화로운 느낌을 주었습니다.

물론 안사람이 불교 신자라 법정 스님에 대한 말씀은 진작에 듣고 있었고 젊은 학생으로부터 ‘무소유’라는 책을 추천받아 펼쳐본 적도 있었습니다. 그렇지만 이제야 제대로 만남이 일어난 것입니다.

얼마 후 법정스님의 ‘물소리 바람소리’라는 책을 읽었습니다. 책 뒷장이 인상적이었습니다. 불당 마루에서 정좌하고 산을 바라보시는 뒷모습이었습니다.

사진 위에는 “텅 빈 마음을 지니는 것은 아주 중요한 일이다. 텅 비워야 메아리가 울리고 새것이 들어찰 수 있다”라는 문장이 쓰여 있었습니다.

법정 스님은 불경에 대한 공부도 대단히 깊으신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만 이 책은 그냥 차밭 이야기, 꽃나무 이야기, 채소밭에 물주는 이야기, 뜰에 눈치우는 이야기 등으로 채워져 있었습니다.

법정 스님의 책들을 통해 그동안 내가 ‘나’라고 생각하는 이 존재를 얼마나 부둥켜 안고 있었는가, 상처받지 않으려고 얼마나 ‘나’라는 존재 주위에 장벽을 세우고 있었는가를 깨닫게 되었습니다.

아직도 ‘나’라는 허상으로부터 훌훌 털고 자유롭지는 못합니다만, 이제 정말 즐겁게 ‘나’를 놓아주고 싶습니다. 법정 스님, 감사합니다.

박성봉 경기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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