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9년 3월7일 시인 기형도가 서울 종로의 한 극장에서 숨진 채 발견됐다. 향년 29세. 기형도는 황지우 이성복 등과 함께 1990년대의 시인 지망생들에게 가장큰 영향을 준 시인이다.그의 첫 시집이자 마지막 시집인 ‘입 속의 검은 잎’은 그가 죽은 지 두 달 뒤인 1989년 5월말 문학과지성사에서 발간됐다.
시집의 첫 페이지에는 시인이 죽기 6개월쯤 전 쓴 시작(詩作) 메모가 실려 있다. “나는 한동안 무책임한 자연의 비유를 경계하느라 거리에서 시를만들었다. 거리의 상상력은 고통이었고 나는 그 고통을 사랑하였다.
그러나 가장 위대한 잠언이 자연 속에 있음을 지금도 나는 믿는다. 그러한 믿음이언젠가 나를 부를 것이다. 나는 따라갈 준비가 되어 있다. 눈이 쏟아질 듯하다.”
예술가의 요절은 흔히당사자의 삶과 예술을 신비로운 아우라로 감싼다. 기형도의 요절도 아마 그랬으리라. 그러나 ‘입 속의 검은 잎’에서 기형도라는 이름을 지우더라도 이 시집은 스스로 한국 현대시사에서 자기 방을 요구할 만하다.
그 방은 좁고 어두운 방이다. 시인은 그 안에서 외롭고 무섭다. 그런데도 그는 밖으로 나오려 하지 않는다. 어디서도 세상과의 불화가 해소될 수 없으리라는 예감 때문일 것이다.
죽음의 이미지가 그득한 표제시는 이렇게 끝난다.
“나는 저 운전사를 믿지 못한다, 공포에 질려/ 나는 더듬거린다, 그는 죽은 사람이다/ 그 때문에 얼마나 많은 장례식들이 숨죽여야 했던가/ 그렇다면 그는 누구인가, 내가 가는 곳은 어디인가/ 나는 더 이상 대답하지 않으면 안 된다, 어디서/ 그 일이 터질지 아무도 모른다, 어디든지/ 가까운 지방으로 나는 가야 하는 것이다/ 이곳은 처음 지나는 벌판과 황혼,/ 내 입 속에 악착같이 매달린 검은 잎이 나는 두렵다”
고종석 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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