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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을 열며] 실패한 '자율' 실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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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을 열며] 실패한 '자율' 실험

입력
2002.03.05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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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 학기가 시작됐다. 항상 그러하듯 시작은 왠지 모를 어수선함과 막연한 불안감을 동반하는 것 같다.언젠가 교수들이 모인 자리에서 개강을 두려워하는 교수들의 모임, 이름하여 ‘개공파’(開恐派)를만들자는 한 동료의 제안에 모두들 공감을 표했던 기억이 난다.

개강이 공포스러운 이유야 여러 가지가 있을 테지만, 아직 몸이 덜 풀린 상태에서 경기에 임해야하는 운동 선수의 마음에다 어쩌면 평생 인연을 맺게 될 지도 모를 누군가를 소개받으러 나가기 전날의 기대 어린 불안감이 합쳐진 것과 같은 심리상태가 아닐까.

그러고 보니 두어 해 전 ‘인간과 사회’라는 교양과목을 담당하면서 희망과 좌절이 교차하던 경험이 생각난다.

대학에서 교양과목은 보통 200~300명 규모의 대규모 강의로 진행되는 데다, 수강 학생들의 전공도 다채롭고, 교수의 말을 거의 이해하지 못하는 1학년부터 교수가 낼 시험문제까지 적중시키는 4학년이 함께 들어오기에, 눈높이를 어디에 맞추는 것이 좋을지 난감할 때가 많은 수업이다.

이처럼 까다로운 학생들을 앞에 놓고 한가지 소박한 실험을 해보기로 했다.

강의를 하면서 부딪히는 난제중의 하나인 출석 체크 및리포트 제출과 관련해 학생들의 자율적 선택능력을 믿어보기로 한 것이다.

해서 출석은 좌석제 대신 ‘수시로’ 부르되 출석 점수는 굳이 평가에 반영하지 않겠다고 공언했다.

출석 때문에 강의실에 들어와 ‘몸 따로 마음따로’인 상태에서 백일몽을 꾸기보다는 본인의 자율적 선택에 의해 출석을 결정하라는 당부를 했다.

그 다음에 리포트는 2회에 걸쳐 제출하는데, 미 제출자에 대해서는 불이익이 돌아가지만 마감일을 어긴다 해서 점수를 깎는 일은 없을 것이라고 예고했다.

자율적으로 마감 일을 지키지 못할 경우 가장 고통을 받는 사람은 바로 자신임을 잊지말라는 사족까지 덧붙였다.

강의는 일주일에 두 번 모두 아침 9시에 시작하는 비선호 시간에 배정되었음에도, 출석률은 예상외로 높았고 리포트제출시 마감을 지키는 비율도 매우 높아적이 안심을 했다.

종강을 하면서 우리 학생들이 자율적 선택의 소중함을 작은 실천을 통해 몸으로 배웠으리라 만족해 하기도 했다.

바로 연이은 학기에도 같은 교양과목을 담당하게 된 나는 내심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이번에도 강의실에서의 자율적 선택을 실험해 보기로 했다. 한데 결과는 의외로 나타났다.

일단 출석률이 이전 학기보다 눈에 띄게 저조하여 매시간 텅 빈뒷자리를 바라보며 허전해 하는 자신을 달래야 했고, 리포트에 관해 반복해서 설명했건만 끝내 “늦게 내면 점수를 깎나요?” 라고 묻는 학생 앞에서 정말 참담한 기분이 되었다.

그 학기를 끝내고 나서야 의문이 풀렸다. 앞서 교양과목을 수강했던 학생들의 성실함은 다 이유가 있었던 것이다.

까닭인 즉 2학년에 올라가면서 전공을 결정할 때 일부 전공학과의 경우 성적을 고려한다는 공지가 있었기에, 해당학생들은 출석을 부르지 않아도 열심히 강의에 참석한 것이었고, 마감 일의 스트레스가 없었음에도 날짜를 지켜 리포트를 제출했던 것이다.

반면 점수의 압력에서 벗어난 학생들은 교수가 부여해 준 자율적 선택의 기회를 자신들의 게으름을 정당화하는데 사용했던 것이다.

수업 시간에 가르쳐주지 않은 문제를 출제하면 다 같이 모른다는 요즘 학생들.

겉으로는 현란한 개성과 다양성을 추구해가는 듯 한데, 실상은 획일화되고 정형화되어 가고 있는 모습을 만날 때가 종종있다.

학생들은 아마도 자신들의 선택에 책임져야 하는 자율의 가치보다는 일사분란하게 통제하는 것을 더욱 편리하게 여길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뒤늦게 나마 든 까닭에, 새 학기를 시작하면서 자율의 소중함을 가르칠 것인지, 강제의 편리함을 밀고 나갈 것인지 서성이고 있는 중이다.

함인희ㆍ이화여대 사회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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