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9년 3월1일을 기해 범민족적인 항일 독립운동이 일어났다.1919년이 육십갑자로 기미년(己未年)이어서 기미독립운동 이라고도 부르는 3ㆍ1운동은 우리 민족해방운동사의 한 분수령이었을 뿐만 아니라, 아시아ㆍ중동 피압박민족들의 해방운동에 기폭제가 되었다.
중국의 5ㆍ4운동과 인도의 배영운동(排英運動)운동인 사티아그라하운동,터키와 이집트의 민족운동 등은 3ㆍ1운동의 성과를 한 동력으로 삼았다.
뒷날 인도의 총리가 될 네루는 감옥에서 딸에게 보낸 편지에서 3ㆍ1운동이 자신에게 준 감동을 곡진히 피력한 바 있다.
그 해 3월1일 오후2시 종로의 태화관과 탑골 공원에서 점화한 이 운동은 북부 지방에서 남부 지방으로 번져가며 1년 여 계속되었다.
첫 3개월 동안의 일제측 통계만 보더라도 전국에서 집회 횟수 1,542회, 참가 인원수 202만 3000여 명, 사망자수 7,509명, 부상자 1만 5900여명, 피체 인원 4만6948명에 이르렀고, 일제는 교회당 47개소, 학교 두 곳, 민가 715채를 불태웠다.
당초 천도교ㆍ기독교 등 종교계가 주도한 이 운동은 이내 전국 모든 계층과 부문의 한국인에게 퍼져갔다. 이 운동으로 투옥된 사람들의 60%는 무종교인이었다.
3ㆍ1운동의 큰 의의가운데 하나는 그 때까지 독립운동의 한 줄기를 이루던 복벽운동, 곧 이씨왕조 재건운동을 제압하고 미래에 건설할 조선민족의 독립 정부를 공화정으로 한다는 명시적 합의를 이끌어낸 것이다.
3ㆍ1운동의 직접적 영향 아래 1919년 4월13일 중국 상하이(上海)에서 수립된 조선민족의 임시정부는 대한민국을 국호로 삼음으로써 그 국체가 공화정임을 명확히 했다.
우리 헌법은 전문(前文)에서 대한민국이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법통을 계승한다고 천명하고 있다.
고종석 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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